대전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오래간만에 계족산으로 발길을 해보았습니다. 대전의 중심이 회덕이었기에 진산은 대덕구의 계족산이었다고 합니다. 공간적 특징을 보면 조선시대의 진산들은 다수가 풍수적 주산(主山) 혹은 조산(祖山)을 중심으로 하는 읍기(邑基) 배후의 산으로 계족산은 봉황산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 기운이 남다른 산이라고 합니다.
대덕구에는 사찰이 많지가 않은데 계족산일원에 용화사와 비래사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대전의 구석구석에는 대전둘레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계족산에도 대전둘레길이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대전에 이사 올 때 처음 회덕이라는 지역명을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당시에는 회덕이라고 하면 촌동네이며 대전에 속하지만 대전 같지 않은 곳이라는 것이 첫인상이었습니다.
운동하는 것도 마음편하게 하기 힘든 시간이네요.
계족산을 좋아하는 분들도 적지가 않는데 그렇게 가파르지 않으면서도 둘레길을 가볍게 걸어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도 자주 계족산을 찾는 편이기도 합니다.
대전에도 많은 산이 있지만 가장 먼저 접한 산은 보문산과 계족산이었습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봉황은 성군의 덕치를 상징하는 의미로 노래나 춤에 쓰였으니 봉황산이라고도 불리던 계족산의 영험함은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밀집될 수 있는 대전의 공원의 대부분은 잠정 폐쇄가 되었습니다. 거리를 둘 수 있는 공간만 돌아볼 수 있는데 탁 트인 곳은 마스크 등의 개인 방역을 하면서 돌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대전으로 이사 왔을 때는 오정동과 중리동 앞에는 물이 흐르는 실개울이 있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한밭대로가 개통되면서 대전이라는 도시가 급속하게 바뀌기 시작한 것을 본 것이 엊그제 같네요. 한밭이라는 이름의 대전의 출발점은 회덕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대다수의 군현에는 진산이 선정되어 있는데 보통 한 고을의 중심이 되는 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봉황은 한쌍으로 표현이 되는데 봉황새는 자웅(雌雄)이 서로 의가 좋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었다는 봉구황곡(鳳求凰曲)이 구애(求愛)의 악곡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봉황은 남녀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라고 합니다.
계족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벤치가 솥뚜껑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계족산에 내려오는 무제의 첫날 솥뚜껑 훔쳐내기라는 행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낙의 집에서 솥뚜껑을 훔쳐서 '솥뚜껑 훔쳐간다' 소리치며 도망가고 여인이 솥뚜껑을 막대로 두드리며 쫓아가면서 욕설을 하는데 욕설이 걸쭉할수록 기우제에 도움이 된다는 속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래전에는 계족산에 사는 동물조차 건드리지 않은 정도로 영험산 산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계족산 무제라는 전통적인 기우제를 했던 곳라고 합니다. 계족산 상봉으로 풍장을 치고 올라가 암장한 시신을 찾아낸 다음 무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계족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계족산 무제에 대한 이야기가 그림과 글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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