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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 오강표가 자결한 공주향교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7. 5. 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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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의 고장이었다는 공주에 향교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보령만 해도 향교가 세곳이 있지만 공주에는 공주향교 한 곳 뿐이다. 전주향교만 하더라도 그 위세가 상당한데 불구하고 공주는 같은 지역의 중심이었지만 그곳보다 그 위세나 규모가 작다. 




한적한 날 통과해보는 홍살문은 기분이 남다르다. 

이제 향교가 익숙하다 못해 친숙해져서 마치 향교를 다닌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공주향교는 조선태조 7년(1374) 웅진동 송산 기슭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광해군 14년 (1622)에 화재로 인하여 일부 전소된 것을 인조1년 (1623)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졌다고 기록상에 남아 있는 상태이다. 




대인과 소인이 따로 있겠냐만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에서는 걸어서 들어가야 된다는 의미이다. 


예전에는 없었던 안내판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이은 1910년의 한일 합병으로 국권을 박탈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오강표 열사의 이야기가 적혀져 있다. 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에서 태어났던 오강표 열사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공주향교의 구조와 그 역사에 대해 접해볼 수 있다. 정면에는 명륜당이 보이고 명륜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숙소들이 위치해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가운데 3칸통은 대청마루로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좌우에 한칸씩 각각 온돌방이 자리하고 있다.




공주향교의 외삼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우측면에는 이곳을 관리하는 관리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의 향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은 명륜당이다. 중국의 학교기관에 연원을 두고 있는 명륜당은 유생들의 강학 장소이며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하는 이유에 대해 철학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의미는 배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번이 공주향교를 방문한 것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 방문했을때에 비해 건물의 유지보수가 안된 느낌이다. 




옛 선현들의 배움이 있었던 곳은 우리의 역사와 맞닿아 있기에 오랜 기간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조금씩 그 흔적을 잃어갈 수 밖에 없다. 



유지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는것인지 아니면 최근에 건물이 낡아서 그런지 몰라도 파란색 천으로 덮여 있는 상태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공주의 구도심이 한눈에 보인다. 굳이 먼곳을 찾아가지 않아도 공주의 구도심을 한 눈에 볼 수 있따. 



공주 향교의 가장 안쪽이며 위쪽에 자리한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3칸, 뒷면 2열을 내부 공간으로 꾸며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 충청도의 중심지이자 주요 교통로에 자리했던 공주에는 충청감영이 있었다. 충청감찰사가 직접 관리하던 공주향교의 강학루는 오강표가 통분하여 자결한 곳이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철거하여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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