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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년의 흔적이 이어진 정대년 신도비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6. 11. 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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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신도비까지 세워진 정대년 신도비는 여주시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갈만한 위치에 놓여 있어서 이곳이 무엇인지 모를수도 있다. 



정대년은 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로(景老), 호는 사암(思菴)으로 아버지는 예문관대교 정전(鄭荃)이며, 어머니는 거창신씨(居昌愼氏)로 증 이조판서 신극정(愼克正)의 딸이다. 1532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관직이 예빈시주부를 거쳐 지평(持平)·장령(掌令)·부교리(副校理)·집의(執義)·직제학에까지 이르렀다. 


신도비를 보기 위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녹음이 우거져 있다. 


대년 신도비 앞에는 홍살문이 자리하고 있다. 정대년은 청백리로 잘 알려져 있는데 1572년 우의정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는가 하면 권신 윤원형(尹元衡)이 자신의 정처를 내쫓고 애첩 정난정(鄭蘭貞)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 외명부 종1품)을 삼은 데 대한 사실 여부를 밝히라는 왕명을 받들고 조사하던 중 윤원형이 이를 알고 뇌물로 무마하려고 하자 완강히 거절했다. 



 이 신도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사암 정대년(1507∼1578)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는데 신비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해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신도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대년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설명이 씌여져 있다. 시호는 충정이었던 정대년은 선조 초에 중요한 요직에 추천할만한 사람이 없냐고 묻자 모두가 서슴없이 그를 추천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원부리 205-3에 있는 정대년 신도비는 손자 정호(鄭灝)가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비문을 받아 세우려고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세우지 못했다가 증손 정양우(鄭良佑)·양필(良弼) 형제가 병조참판 오준(吳竣)의 글씨와 홍문관부제학 김광현(金光炫)의 두전(頭篆)을 받아 세웠다고 한다. 



두 마리의 용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물이 샘솟듯이 흘러나오는 것이 인상적이다. 



정대년 신도비의 비문에는 정대년의 성장과정과 관직생활, 그리고 간소한 생활과 엄정한 일 처리 등이 적혀뎌 있는데 그 유명한 석봉체를 따라 씌여졌다. 


정대년은 문정왕후와 같은 시대에 살았는데 특히 윤원형의 위세에 정면으로 맞섰던 사람이기도 하다. 



문정왕후, 명종, 윤원형, 정난정까지 드라마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기억이 남아 있는데 동시대에 살았던 정대년의 흔적을 이곳에서 찾으니 반갑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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