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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게 묘자리를 내준 충희공 이인손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6. 12. 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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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에 가면 아주 묘자리가 좋은 곳이 있다. 현재 세종대왕과 효종대왕의 묘로 사용되고 있는 곳으로 직접가서 보면 참 좋은 입지에 묘자리를 썼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곳은 원래 이인손의 묘였다. 


이인손의 본관은 광주로 1411년ㄴ 생원시에 합격하고 6년 후인 1417년에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한 뒤 검열에 발탁되었다. 



이인손의 시호는 충희로 사헌부감찰, 천추사의 서장관, 형조좌랑, 예조좌랑, 집의, 판군자감사, 예조참의, 경상도관찰사, 형조참의, 대사헌, 한성부윤, 형조참판, 호조판서, 원종공신 2등 및 우찬성, 우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주요 요직이란 요직은 모두 거쳐간 이인손은 단순히 운이 좋았던 사람일까? 


이인손의 집안이 원래 묘자리로 사용했던 현재 세종대왕의 자리는 그렇게 터가 좋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의 아들대에 이르러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자 세조의 아들인  예종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큰아들 광릉부원군 이극배(성종 때 영의정)를 조정으로 불러 명당 터를 양도해달라고 우회적으로 압력을 가하였다. 



이인손의 묘 바로 옆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건물인지는 몰라도 대가집 가옥같은 느낌의 집이 세워져 있었다. 


이인손의 가문이었던 광주이씨 가문에 많은 재물을 하사한 뒤 이극배를 정2품 의정부 우참찬으로 승진시킨 후 조선의 어느 곳이라도 이인손의 묘를 쓰라고 하였다. 그래서 옮긴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런데 이인손의 묘를 파보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단지대왕영폄지지(短之大王永?之地)’

한 쪽 다리가 짧다는 뜻의 단지대왕은 세종대왕을 의미하기도 한다. 




글을 계속 읽어보니 세종대왕이 묻힐 자리에서 연(鳶)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나의 묘를 옮겨라’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적혀져 있는대로 연을 날리자 연은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약 10리 밖에 떨어졌다. 연이 떨어진 곳에 이인손의 묘택을 삼았다.



연이 끊어진 곳이라고 하여 연당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이 바로 현재 능산면 신지리(연주리)이다. 이곳에 충희공 이인손이 잠들어 있다. 


천하의 명당자리를 세종대왕의 묘자리로 내주었다고 하지만 광주 이씨가운에서는 이덕형을 비롯하여 수많은 급제가가 나온 가문이기도 하다. 



이인손은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자신의 사후에 묘를 쓸 때 재실과 돌다리를 만들지 말라고 했지만 후손들이 만들 것도 예상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묘자리를 옮기기 위해 돌아다니던 지관 안효례는 광주 이씨의 재실로 비를 피했고 결국 그곳이 명당인 것을 알았던 셈이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자리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인손은 자신이 들어갈 자리라고 생각하기 보다 군왕이 들어갈 자리가고 예상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과한 꿈을 꿀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되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이곳에 묻히게 된 이인손은 자신이 과한 자리에 묻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묘자리 덕분에 가문이 번창하였던 광주 이씨 가문의 이인손의 묘가 옮겨진 덕분에 조선 이씨 왕조가 500여년간 이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정승가문이었던 후손들은 조금은 예종이 미웠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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