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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무능했던 루이16세 vs 고종황제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3. 6. 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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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일본의 식민지 시절의 옳고 그름을 가지고 교과서때문에 시끌하다. 조선은 정조시대를 지나 순조에 이르면서 그 역사가 끝났다고 보는것이 맞다. 이후에는 어떤 열강이 들어와서 조선을 침략해도 무너질만큼 각종 힘을 가진 권세가들의 탐욕이 심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패악은 이루말할바가 없고 매관매직을 하는것은 1700년대의 프랑스와 다를바가 없었던 시기가 1800년대의 조선이다.

 

아마 일본이 들어와서 조선을 지배하지 않았다면 동학혁명이나 더 큰 민란으로 인해 고종과 명성왕후는 끌어내려져 지배적 권력의 상징으로 죽임을 당하고 근대적 민주주의 시발점으로 출발하였을지도 모른다.

 

균형적인 조선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정조와 달리 그의 아들 순조부터 임금의 그릇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이 순조비가 되고 김조근의 딸히 헌종의 비, 김문근의 딸이 철종의 비가 되면서 안동 김씨에 60년 꽃같은 세도정치는 시작이 된다. 온갖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탐관오리뿐만 아니라 1700년대의 프랑스는 저리가라 할정도의 백성의 삶은 바닥을 치닫고 있었다. 동학혁명이 실패한것은 외세의 세력때문이기도 했으나 1700년대의 프랑스처럼 지식인들이 앞장서지 않고 민초들만 일어난 결과이기도 하다.

 

비교되는 리더 고종과 메이지 천황

 

고종은 무엇때문인지 몰라도 의미없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황제에 오르면 그만큼의 영향력과 리더쉽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그냥 외세에 힘입어 어떻게 조선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에만 집중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1868년 안동의 세도가들과 같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다. 왕정복고의 기치 아래 메이지 천황을 옹립해 메이지 유신시대를 열었다. 메이지 유신 초기에는 금록공채를 자본금으로 삼는 기발한 생각을 통해 자국 금융 시스템을 거의 완벽하게 통제했고 식민지화의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현대 산업 강국으로 도약한다. 전쟁은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충분히 마련할 기틀을 마련한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고종은 장기적인 혜안도 없었을뿐더러 명성왕후와 대원군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외세에 기대어 바르게 다스리지 못했다. 심지어 고종즉위 당시는 메이지 유신이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전이기까지 하다. 유약하면서 전략적이지도 않았고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으며 당시 세계의 정치적 상황은 전혀 모르는 인물이였다. 헤이그밀사같은것을 보내서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모든 열강이 자신보다 열등한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나누어먹기 하는 현실에 저 변방의 나라 조선의 입장따위는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1865년 ~ 1875년 사이의 두나라 리더들이 보여준 능력에 따라 일본과 조선은 상당히 다른길을 걷게 되고 일본은 열강의 대열에 조선은 식민지 국가의 대열에 끼게 된다.

 

 

 

안동김씨 VS 매관매직을 가진 귀족

 

조선을 잘 요리해 먹던 안동김씨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매관매직을 하던 귀족들이 있었다. 토지의 상당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귀족은 토지세를 면제받았다. 안동김씨 역시 별다른 조세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당시 프랑스 국민의 0.6%에 불과한 제1신분 성직자와 0.4%에 불과한 귀족들이 정말 많은 권리를 향유했지만 의무에서는 자유로웠다. 시간적인 차이가 100여년 있었을뿐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탐욕과 부패는 공통점이 있었던듯 하다.

 

1793년의 프랑스는 루이16세의 죽음으로 봉건왕조가 몰락하였지만 1793년의 청나라는 전세계 GDP의 1/3을 차지하는 경제강국이였다. 그러나 1793년을 기점으로 청나라는 쇠락해갔고 서방국가인 프랑스는 근세민주주의를 미국은 워싱턴의 대통령 연임과 민주주의의 확립을 하기에 이른다. 청나라는 1840~1842년의 1차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열강등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게 된다. 1차에 이어 2차 아편전쟁도 굴욕적이라고 할만큼 패했는데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청바라기는 끝나지 않을 꼴이다.

 

 

 

마리 앙뚜아네트 VS 명성왕후

 

어찌보면 명성왕후가 국가에 미친 패악은 마리 앙뚜아네뜨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만들어주었으며 허영도 심했던 명성왕후와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각종 사치에 몰두했으며 파티나 무도회를 자주 여는등 무절제한 생활로 왕정의 재정을 낭비(?)했을 뿐이다.

 

흉년으로 고생하는 민중들이 먹을 빵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거 아냐라는 말했다는 일화도 있었다는 마리앙뚜아네트와 동일하게 명성왕후도 임오군란의 군인들이나 백성이 굶주리면서 쌀이 없다고 말할때 그럼 떡이라도 먹으면 될거 아니냐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명성왕후 민씨는 가난하게 자랐다고 하나 이건 어디까지나 권력가의 기준으로 보았을때 판단기준이다. 즉 재벌들이 있는데 중견기업의 대표정도는 그냥 가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치기준으로 꽤 잘살았지만 안동김씨의 세력이나 풍양조씨의 세력만큼 외척이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성왕후는 권력가였을 뿐이다.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어서 평가가 좋게 받는것 뿐이지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고 외척세력을 지켜주기 위해 무슨일이라도 서슴치 않았던 인물이다. 당시 방한했던 외국인의 눈에는 기민하고 영특한 외교관이라고 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세력을 적당하게 이용할줄 아는 인물 이였을뿐이였다.

 

특히나 한국이 요 근래 취했던 각종 FTA의 불평등 논란을 가지고 말이 많은데 그건 불평등한것도 아니다 명성왕후가 문호개방정책을 한다는 기치아래 각종 열강과 조약한것은 엄청난 불평등 조약이였다. 그것은 외교력이 아니라 나라의 이권을 통채로 가져다 바치는것이다.

 

내 백성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고 백성들의 바람은 귀로 들을생각은 하지 않았다.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자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안정적인 자본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일본역시 군대를 이끌고 들어온다. 1864년에 고종이 즉위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까지 명성왕후는 음악도 좋아하고 춤도 좋아했던 풍류가였다. 그리고 그상으로 하사한 금품이 엄청나면서 국고는 탕진되어 갔다. 왕실은 태평성대였지만 백성들은 굶주려 갔다.

 

결국 외교력을 너무 과신한나머지 1895년 명성왕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다. 시해되면서 고종에게 '종묘사직의 중대함을 잊지 마소서'를 남겼다고 하는데 죽어가면서까지 조선의 백성의 안위따위는 관심에도 없었던 인물일뿐이다. '내백성 한명한명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면 어땠을까? 이를 기점으로 한국은 근세민주주의로 나갈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다. 약 100년전인 1793년에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그해 마리 앙뚜아네트 역시 참수형을 당한다.

 

생각이 있었던 지배적 권력의 주인이였다면 적어도 유럽의 근세 민주주의쯤은 습득했어야 한다. 부패하고 온갖 비리가 난무했던 말기 청나라의 흔적을 따라갈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헤이그 밀사를 보낼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의 사례에서 조선이 나아갈길을 찾고 이웃나라 일본의 변화을 면밀히 체크해보았다면 조선의 역사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의 역사의 틀을 상당히 바뀌지 않았을까?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것도 좋지만 기껏 가비(커피)나 먹을거리 그리고 각종 외국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그쳤던 당시 고종왕실은 누가 지배해도 이상할것이 없을정도로 힘이 없던 나라였다. 역사를 단정해볼수는 없지만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조선의 왕실은 스스로 민중에 의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조선이 외세에 무너졌다는 생각이 있기에 '궁'같은 조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만화나 드라마가 생겨나는 법이다.

 

과도시기에 조선은 왜 프랑스의 자크 네케르나 미국의 알렉산더 해밀턴 같은 인재가 없고 어설픈 혁명가 김옥균 같은 사람만 있었을까.

 

PS 당시 청나라의 해군이 얼마나 썩었냐면 충분히 일본을 앞설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태하고 부패하게 함대를 운영하다가 결국 1894년 9월 17일 일본보다 규모가 더 컸던 중국함대는 일본함대에 전략적으로 전술적으로 모두 패하게 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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