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살짝 비틀어진데다가 인물도 없었다는 사람이 있다. 과거에도 계속 떨어져서 그냥 문지기로 살던 남자는 수양대군을 만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엿보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2,300여 건이나 등장하는 이 사람은 , 세조 대부터 성종 대까지 3대에 걸쳐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인물로 그 이름은 한명회다.
오래간만에 날이 풀려서 그런지 천안의 동쪽자락에 자리한 한명회의 묘를 찾아가 보고 싶어졌다. 청주한씨인 한명회는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면서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다.
왕 한 명의 외척만 되더라도 대단한 권세를 누렸을텐데 무려 세 명의 왕과 함께 천하를 호령했다. 그런 권세를 누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세상에 못할 것은 없고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다면 아마도 걱정이라는 단어는 이해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한명회는 청주한씨로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유래(由來)는 후조선 (後朝鮮)인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기원(起源)하였다. 한명회의 묘는 천안에 있지만 그 성씨는 청주로 삼한시대의 마한의 땅이었다가 백제때는 상당현으로 불리웠던 곳이기도 하다.
한명회의 묘 옆에는 사당도 있다. 한명회는 단종 1년 (1453) 계유정난때 참모로 세운 공을 인정받아 군기녹사, 사복시소윤, 동부승지, 좌익공신 1등으로 우승지까지 올라갔으며 3년 후 세조 2년 (1456)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저지하면서 지금의 비서실장인 도승지로 승진 1년후인 1457년 이조판서로 상당군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에까지 오르게 된다.
한명회 신도비는 조선시대 2품 이상 관직을 한 사람에 한하여 무덤에 들어가는 입구에 세운 비를 말하는데 비의 밤침에는 인상이 새겨져 있고, 덮개 돌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를 돋을새김 하였는데 조각수법이 우수하다. 비문은 서거정이 지었다고 한다.
한명회의 묘는 다른 조선의 대신들의 묘와는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이산해의 묘는 길지에 상당히 큰 규모로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한명회의 묘는 살아생전의 권세에 비해 소박하게 묘자리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마치 제주도에서 만들어진 묘를 보듯이 돌로 주변을 감싸고 있다.
역사는 지나고 보면 이렇게 석등의 뚫린 공간으로 보듯이 명확하게 보이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명확하지 않아서 역사는 후대에 평가받는다고 하는 모양이다.
한명회는 야심이 큰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수양대군을 점찍었던것 같다.
한명회는 권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운데 간사한 무리들이 권세를 함부로 부리고, 또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마음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대신들과 친밀하게 교결(交結)하며 여러 소인들을 불러 모으니 화기(禍機)가 매우 급박하오.
듣자니 수양대군이 활달하기가 한 고조와 같고 영무(英武)하기가 당 태종과 같다 하니, 진실로 난세를 평정할 재목이오. 그대가 문필에 종사하는 즈음에 모신 지가 오래인데, 어찌 은밀한 말로 그 뜻을 떠보지 아니했소?”
살아생전에 그렇게 드 높던 권력도 끝이 있었다. 한명회는 거칠 것이 없이 살다가 성종의 눈 밖에 나고 나서 말년의 평판을 관리했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자신의 정적을 가차 없이 제거하면서 휘두른 칼날은 역사적 과오로 기록되었지만 자신의 이름도 남기고 이렇게 신도비도 세웠으니 반은 성공한 인생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행을 떠나요(1000) > 한국여행(충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성의 대표 농촌작가 이무영을 만나다. (0) | 2018.02.13 |
---|---|
영하 14도의 온도에 나들이한 청수호수공원 (0) | 2018.02.12 |
반나절의 시간 동안 산책하기 좋은 천안 천호지 (0) | 2018.02.10 |
자카드 섬유 기술이 내려오는 공주 유구면 (0) | 2018.02.08 |
마을의 질병을 막아주었다는 동원리 석탑 (0) | 2018.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