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인물로 대대로 벼슬을 하지 않던 집안에서 태어나 1880년(고종 17)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宣傳官)이 된 사람이 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仁, 樂寅), 호는 운강(雲岡). 아버지는 기태(起台)인 사람은 바로 운강 이강년이다.
운강 이강념 전승기념비와 경보각은 갈평과 단양으로 갈라지는 갈평삼거리 부근에서 10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는 문경에서 유명한 사과나무 밭들이 있다.
운강 이강년은 1895년 8월 민비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했는데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고 한일신협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더 큰 규모의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이 지역 주민들은 운강 이강년 선생의 구국을 위한 위정척사사상의 충정을 기려 1967년에 정성과 뜻을 모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운강 이강년 기념관을 예전에 한 번 찾아가본 기억이 있는데 전승기념비가 국도변에 만들어져 있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다.
이곳 부근에서 일본군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한 운강 이강년은 9월 16일에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단양 고리평(故里坪), 10월 23일에는 풍기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경모각에서는 운강 이강년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이 지역의 지리에 밝고 또 엄격한 군율로 의병부대의 기강이 서 있어서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의병세력이 바로 이강년이 이끄는 세력이었다고 한다.
누군가의 흔적이 남겨진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곳 갈평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던 운강 이강년은 청풍(淸風)·작성(鵲城)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1908년 6월 4일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평리원으로 옮겨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10월 13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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