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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 원호 단종에 대한 절의, 원주에 잠들다.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7. 8. 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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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를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생육신이니 사육신이니 하는 사람들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사육신에 비해 벼슬을 버림으로써 절개를 지킨 생육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편이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림으로써 절개를 지킨 생육신은 맹전(), 조여(旅), 원호(), 김시습(), 성담(), (또는 ()로 이중에 원호의 묘가 원주에 있다. 



집현전 학자들은 당시 김종서와 황보인이 주도하는 재상 중심의 정치운영 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세조와 뜻을 같이 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왕권중심의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학자들의 신하중심의 정치철학과 달랐다. 


생육신이었던 원호의 묘는 강원 원주시 판부면 내남송길 131-15 에 자리하고 있다. 초기에 뜻은 같았으나 이후 갈길이 다른 주 세력은 결국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단종 복위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본관은 원주이며 자는 자허, 호는 관란인 원호는 1423년 (세종5)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영월 서쪽에 관란재(觀瀾齋)를 짓고 조석으로 영월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단종에게 충심을 다했던 원호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고요하면서 조용하기만 했다. 


원호의 묘역에는 옛날 비석으로 보이는 비는 한쪽에 다시 세워져 있었다. 


원호는 세조가 호조참의로 임명했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단종의 능이 집의 동쪽에 있다 하여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동쪽으로 향했으며 손자 숙강이 예종 때 사관으로 있다가 직필로 주살당하자 자신의 자손들에게 글을 읽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원호는 사후에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었다. 


국가가 설립되고 나서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가깝기도 하지만 먼 관계로도 이어져 내려왔다. 수많은 역사책에서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써내려 갔다. 잘 맞는 군주와 신하도 있었고 잘 맞지 않은 군주와 신하도 있었다. 태평성대에서는 대부분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불가근 불가원의 였던 것 같다. 


조선하면 선비사상을 빼놓을 수가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선비라고 하면 글만 읽는 사람이나 점잔을 빼는 그런 존재라고 인식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조선의 정신을 이어가는 계층이며 그 시대의 절의를 상징하기도 했다. 


관란 원호에 대해 조금이라고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은  '원생몽유록'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조선 중기에 임제가 지은 한문소설인 원생몽유록에는 강개한 선비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다 .


"
"왕의 노래를 시작으로 신하들이 차례로 음영하고 마지막으로 자허는 감정이 복받쳐서 눈물을 흘리며 시 한수를 읊으니 일동이 듣고 비감에 젖게 된다. 이 때 씩씩한 장부(兪應孚에 해당)가 자리로 뛰어들어와 왕에게 인사하고 썩은 선비들과는 대사를 이룰 수가 없다며 칼을 뽑아 춤추며 큰 소리로 노래한다.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며 비바람이 치고 우뢰가 한 번 울리자 자허는 꿈에서 깨어난다는 이야기이다."



[Daum백과] 원생몽유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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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는 자신의 양심이 말하는대로 지켰으며 그렇게 인생을 보냈다. 원생몽유록에는 폐주 단종과 사육신의 억울한 경우를 드러내어 그속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고 있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부조리한 면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관란 원호같은 사람이 여전히 있기에 인간사는 이어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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