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충신을 다섯명을 꼽으라면 그 안에는 성삼문이 들어갈 듯 하다. 단종의 죽음이 비극적이었기 때문에 사육신의 이미지가 더욱더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듯 하다. 홍성군 홍북면에서 태어난 성삼문(1418~1456)이 결정적으로 죽게 된 사건은 김질의 고자질때문이였는데 이때의 나이가 38살이었다.
성삼문은 외할아버지 고택이 있던 이곳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이름은 선생이 태어날때 하늘에서 '아이를 낳았느냐'라고 3번 물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리고 있다.
생가터앞에는 성삼문 선생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는데 유허지와 유허비가 따로 세워져 있다.
유허비는 보통 옛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전하고 이를 계기로 추모하기 위해 세우는 비이다.
문화관광해설 안내라고 되어 있어서 문화관광해설사와 안내시간이 나와있을지 알았더니 어떤 연락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지금은 안내하고 있지 않는듯 하다.
이곳의 현판은 모두 한글로 쓰여 있다. 충절문이나 충문사 도 한글로 적혀져 있다.
이곳 성삼문유허지가 충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것은 2007년으로 아직 10년이 되지는 않았다.
성삼문 선생의 초상화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성삼문의 호는 매죽헌, 본관은 창녕이다. 도총관 승의 아들로 1438년에 하위지와 함께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했다. 직집현전으로 신숙주와 함게 '예기대독언독'을 편찬하였으며 정음청에서 정인지 등과 한글 창제를 앞두고 명나라 언어학자로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황찬에게 13차례나 내왕하면서 음운을 연구하여 한글창제에 기여하였다.
만들어진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이 사적기는 1990년 6월에 충남대학교 교수 성주탁이 지어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노은리 마을 전경이 펼쳐진다.
모진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할말은 모두 다했던 성삼문은 세조와 대면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다.
죽기를 각오한 성삼문은 세조에게 끝내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른다.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은 왜 먹었느냐?"
이에 성삼문은 아래와 같이 답한다.
"상왕(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의 신하인가. 당신이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보라"
세조가 명하여 집을 수색하니 녹은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이런태도는 세조를 더화나게 만들었는데 쇠를 불에 달궈 단근질로 성삼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지진다.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라"
성삼문의 가묘가 있는곳으로 노은단이라고 부른다. 노은단은 원래 녹운서원이 있던곳에 만들어졌는데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려 철폐되었고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노은단이라고 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가묘라고 해도 구색은 갖추어놓은 상태이다.
성삼문의 절의를 기리며 이곳 주변에 성삼문 오동나무를 식재했다고 하는데 성삼문 오동나무는 성삼문 선생이 과거에 급제하자 아버지인 성승장군이 북을 달았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세조(1417~1468)는 성삼문 등을 죽이면서 “박팽년과 성삼문 등은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라고 말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자질을 엿볼 수 있다. 성삼문은 세조의 명에 따라 능지처사를 당했는데 조선시대의 능지처사는 칼로 각 부위를 잘라내지 않고 각각의 부위를 수레에 매어 소를 달리게 하는 ‘거열형’으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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