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1000)/해외여행·맛집

러일전쟁의 교두보 만제키바시 다리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8. 24. 06:30
728x90
반응형

대마도는 북과 남으로 길게 이어진 지형을 하고 있다.

북과 남으로 이어진 대마도를 건너려면 두개의 다리를 거쳐야 하는데 그중 만제키바시 다리가 가장 길다. 만제키해협을 연결하는 아치형의 다리로 아소만과 미우라만 을 양쪽에 두고 있다. 이곳이 완공된 것은 1900년으로 길이 300m, 폭22m, 수심3m의 운하로 만제키세도 운하라고 부른다.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운하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시티의 파나마 운하이다. 경제적인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만젠키세도 운하처럼 전쟁 목적으로 건설되기도 한다. 지금 핫한 운하 건설로 주목받는 것은 바로 니카라과 운하이다. 니카라과 운하는 안보나 경제적인 목적에 의해 중국자본으로 건설되고 있다. 수에즈 운하는 통항의 자유가 저해되지 않도록 국제적 합의가 이뤄져 있지만 파나마 운하는 그런 합의가 없다. 그 파나마 운하를 가장 많이 행사하는 나라중 하나가 중국이다. 그래서 니카라과 운하에 큰 돈을 대고 있다.

 

 

 

 

 

 

지금이야 북쓰시마와 남쓰시마를 연결하는 가장 큰 규모의 다리에 불과하지만 이곳은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카드중 하나로 사용된 곳이다. 당시 러시아의 국방비는 일본의 세배를 사용하였고 군대 규모는 110만명에 달했는데 이는 일본에 비해 무려 여섯배에 달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였지만 일본은 장기적인 준비를 한다.

 

1896년 일본은 10개년 해군 발전 프로그램에 착수를 하였다. 최소한 10년을 내다본 것이다. 1904년 미카사호 전함을 6척 영국에서 개조하여 도입하였고 이어 신형함대 구축에 성공하였고 그 함대를 이끌 사람으로 도고 헤이하치로를 선택하였다.

 

무려 300년이 넘는 경험이 축적된 러시아 함대를 맞아 전략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이곳을 뚫었다.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이것을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다. 짦은 거리를 이용하여 러시아 함대는 전투 대형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미카사 호는 강력한 단.중거리 포를 이용해 러시아 함대를 두드린다.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할정도로 국제정세를 잘 읽지도 못했고 러시아에 과도하게 의존하였다. 국왕의 무능이나 나약함이 단적으로 보여지는 사건이다. 1863년에 즉위한 고종은 1868년 메이진 유신이 성공했을때나 1871년 일본이 일본 생도들을 영국해군사관학교에 12명을 보내 교육시킬때 어떠한 것도 직감하지 못했다. 그 12명에는 러일전쟁을 성공이다 못해 완벽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었던 도고 헤이치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해군은 초기에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고종이 즉위한 1860년대도 그다지 강한 해군력따위는 없었던 일본은 1870~1890년대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조금만 신경쓰고 정보수집을 했더라면 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던 러시아가 1856년 크림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에 집중했을 것이다. 이는 산업혁명에서 서양열강에 뒤쳐짐을 의미한다. 러일전쟁은 생각지 못한 결과가 아니라 일련의 과정들이 퍼즐조각처럼 이어맞춰지면서 일어난 것이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인해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병합이 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