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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명재상 아산 맹사성을 만나다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5. 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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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영장군의 조카 사위이면서 조선 초기에 재상을 지냈던 인물 맹사성은 청빈한 삶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파트와 현대식 주택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옛날부터 살아온 고택은 그 사람의 삶의 철학을 담아놓은 공간이다.

 

옛 사람의 수명을 생각해볼떼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80평생을 살았으니 장수했다고볼 수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480~4에 위치한 맹씨 고택 주변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그래서 맹씨 행단이라고 부른다.

 

외암 마을과 또 다른 고즈넉함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행단 입구와 행단 내부를 돌아다니다보면 적지 않은 고목들이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배롱나무, 노송, 회화나무등이 주변에 심어져 있다.

 

 

조그마한 돌다리를 건너본다. 이곳이 행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6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행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후학에게 글을 가르치며 공부하는 자리의 의미이기도 하다.

 

 

맹씨의 시작은 먼 신라로 올라가게 되는데 중국 맹자의 40대 손인 맹승훈이 당나라 말기 신라로 넘어와 정착했으며 맹씨 후손들은 맹승훈을 한국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신창 맹 씨 문중에서는 맹사성의 증조부인 맹의를 맹씨 1세로 정하고 있다.

 

오래된 고목 두그루는 울창한 회나무와 소나무로 맹사성이 황희, 권진 등 두 재상들과 우의를 다지는 뜻에서 회나무 아홉그루를 심은 것 중 남은 두 그루의 나무이다.

 

 

 

 

이 수수한 고택은 고려말의 최영장군의 아버지인 최원직이 1330년(고려 충숙왕17)에 지어 살다가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에게 물려 주었다고 한다.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된 인연이 거기서 이어졌는지 모른다. 아버지 맹희도는 정몽주와 절친으로 알려져 있고 고려에서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전도 상당한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바로 이고택이 맹사성이 살던 고택이다. 공자형 고려시대 건축물인 이 고택은 30평이 채 안되는 규모를 자랑(?)한다. 고택은 정면4칸, 측면3칸의 ‘공(工)’자형 평면집으로 중앙에 2칸 대청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 왼쪽에 한칸씩의 작은 온돌방을 둔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려 고택이다.

 

조선조에 중수한 기록이 있는데 애초에 딸려 있던 부엌채와 헛간채, 사랑채는 없어진 상태이다.

 

고려말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하나였던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孟裕), 아버지 맹희도(孟稀道), 그리고 맹사성의 위패를 모신 사당 세덕사(世德祠)가 이곳에 있다.

 

 

 

맹씨 행단 옆으로는 이렇게 졸졸 물이 흘러내리고 있어서 더 느낌이 좋다. 맹사성은 조선시대에 재상의 길을 선택했지만 아버지 맹희도는 출사하지 않고 온양에서 살면서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맹희도 자신은 새로운 왕조에서 일하지 않는 삶을 선택했지만 아들인 맹사성에게는 자신의 삶을 살 것을 권하였다. 즉 자식과 자신의 삶을 별개로 인식했던 깨인 생각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조선에서 벼슬을 했지만 고향에 오면 맹사성은 직접 호미를 들고 농사일을 시키는 등 백성들의 고된 삶을 무언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맹씨 행단은 설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설화산은 이른 가을부터 늦은 봄까지 눈이 덮혀 장관을 이뤄 설화산이라고 부른다. 해발 441m의 별로 높지 않은 산이지만 아산의 대표적인 산으로 천안과 아산지역을 관장하는 산신이 있는 곳으로 산의 정상이 붓끝 모양으로 뾰쪽하여 문필봉(文筆峰) 이라고 부른다.

 

해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올라서도 돈을 받는 지금 맹사성의 청빈한 삶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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