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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오현중 한명 초려 이유태선생 유허지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5.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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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행을 보냈다는 공주 이유태 유허지는 말그대로 유허지로 고택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유태는 현종.숙종 대의 문인으로 특히 현종 때 학덕이 높은 유학자로 크게 활약하였다고 한다. 충청오현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은 이유태를 비롯하여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유계이다.

 

 

 

그 유명한 제2차 예송논쟁이 숙종1년 (1675)에 일어나자 남인의 배척을 받아 영변에 유배되었다. 이때 숙종의 나이는 불과 10대 중반에 불과했다. 이유태선생은 유배 이후 중동골에서 거주하면서 용문서재, 사송서재, 중동정사등을 세워 후학을 가르치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유태 선생은 다른 양반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계룡시에 고택이 있는 사계 김장생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예학에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김집의 천거로 인조때 공조 이조참의와 승지를 지냈지만 현종대에 와서는 사헌부 대사헌을 비롯하여 22번이나 벼슬을 내렸지만 거부하였다. 이유태 선생은 민심이 흔들리고 국정 동요의 원인을 '농민의 유리와 토지의 황폐'로 진단하였다.

오래된 고택과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한옥과의 조화가 느껴진다.

조선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그는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부세 및 인역제를 개혁할 것을 상소문으로 올렸다.

 

이유태 선생은 57세가 되던 1663년에 이곳 중동골로 온 다음 용문서원을 건립하여 후학들을 길렀다. 1675년 제 2차 예송논쟁때 영변으로 5년간의 유배생할을 하게된다 이후 1680년에 돌아와 용문서원을 다시 열고 후학을 양성한다.  

 

후손들이 이곳에 거주하시는 것 같아 너무 깊숙히는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이유태 선생의 묘는 충남 연기군 남면 중촌리 산 324에 있다. 1883년 고종이 신도비를 내린다.

 

이유태 선생 유허지로 가는길에 오래된 연자방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연자매라고도 부르는 연자방아는 맷돌처럼 둥글게 다듬은 판판한 아랫돌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윗돌을 옆으로 세우고 나무 테를 씌운 다음 한쪽 끝을 끌어 곡식을 찧거나 빻는 농기구의 한 종류이다.

 

 

고난이 있어야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생각이 나오는 모양이다. 원래 이유태 선생은 한미한 출신으로 민재문에게 배우다가 김장생.김집 부자를 사사, 그 문하의 쟁쟁한 후학들과 함께 호서산림 오현의 한사람으로 자리한다. 소론에 의해 추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초려집>> 26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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