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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효자라는 소학리 효자 향덕비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5. 1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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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소학리에 가면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된 이곳의 비는 우리나라 기록상 최초의 효자인 향덕의 효행을 가리는 비석이라고 한다. 신라 경덕왕 때 부모가 가난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성을 모셨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 효자의 향덕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효자 향덕비보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의 보호수도 상당한 수령을 자랑하고 있다.

 

 

멀리 효자의 오래된 비와 비교적 근시대에 만들어진 신비가 자리하고 있고 두칸짜리 건물이 이를 보호하고 있다.

 

 

 

1741년(영조 17)에 세운 정려비의 앞면에는 "지극하여라, 효자여/떳떳한 마음으로 온전함을 이루었으니/이미 허벅지 살을 베었는데/ 또 다시 종기를 빨았도다/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땅을 주고 집을 내리셨다/마을이 효자로서 이름이 났으니/영원토록 그 이름 계속될지어다" 라는 시가 쓰여 있다.

 

이 비는 영조 17년 (1741)에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이 비문을 다시 써서 세운 것이다. 비교적 오른쪽 비에 비해 잘 관리된 듯한 느낌이다. 신비는 전체 높이 160cm로 8각 대석 위에 비신을 하고 있다.

 

 

이 비는 왼쪽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윗부분이 잘라져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비의 내용에는 “之閭(지려)”와 “三月日重立(삼월일중립)“ 중 중립이라는 문구가 있어 경덕왕 때에 본래 세운 비는 아닌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머니를 향한 효심이 무엇을 받기 위해서 행한 것이 아니었지만 향에서는 그 효행을 알고 이 사실을 주에 보고하고, 주에서는 왕에게 아뢰니, 왕이 명을 내려 벼 300곡 (1곡은 10두)과 집 한 채, 그리고 토지 약간을 내렸다고 한다.

 

수령이 500년을 훌쩍 넘은 이 보호수는 느티나무로 관리번호 12-5로 관리되고 있다.

너무 수령이 오래되어서 그런지 나무의 한쪽만 간신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나무의 기둥은 상당부분 그 속살을 보이고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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