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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를 찾아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3.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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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때 독립운동을 말하면 대표적인 인물 유관순을 빼놓고는 논하기 힘들만큼 그녀의 독립운동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現 병천면 용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유중권씨의 삼남이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색다른 교육관을 가진 부모님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난다.

 

선교사 부인인 Ms. Alise H. Sharp의 배려로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 보통과 3학년으로 편입학하였는데 이때 다양한 사상과 세계사 동향을 접하게 된다.

 

 

 

그녀가 태어난 이곳 초가집은 그녀의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바야흐로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로 가고 있을때였다. 1918년 11월 1차대전이 끝나고, 이와 때를 맞추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공포되었다. 때 마침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서거가 전 민족을 울분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고 전체적으로 독립에 대한 염원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아우내 만세운동이 논의되던 곳이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가 두려워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리자 유관순은 이곳 고향으로 내려온다.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동안 서울에서 있었던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하며 독립운동을 이야기한다.

 

 

거사일은 아우내 장터의 장이 서는 음력 3월 1일(양력 4월 1일)로 잡았는데 유관순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에 참가하도록 설득하고, 밤새도록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거사일이 되자 이미 연락한대로 알고 찾아온 군중과 장사꾼으로 아우내 장터는 독립운동의 기운이 모이기 시작하고 유관순은 행렬의 선봉이 되어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때에 유관순의 부모님은 왜병의 총에 살해당하고 자신은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녀는 천안 헌병대를 거쳐서 공주 재판소로 넘어갔는데 추국하였으나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국당시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핀잔을 주자 관순은 일어나 걸상을 들어 검사를 쳤는데 이로 인해 법정 모독죄를 추가하여 당시 함께 재판을 밭았던 누구보다도 중형인 7년형으로 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 갇힌채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마침내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감방에서 순국을 하였다.  죽고 나서야 나온 출옥일로부터 삼일 째 되는 1920년 10월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 조촐히 장례 지냈다고 한다.

 

생가 근처에 오니 유관순 열사 생가 관리사가 있는걸 알게 된다.

아우내독립만세운동 이후 유관순열사의 가족은 거처할 곳이 없었는데 오랜시간이 지난후 정부에서 1977년 본 건물을 한옥으로 건축하여 열사의 가족에게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를 관리하면서 거처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의 남동생인 유인석씨의 가족이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비어 있다.

 

 

 

유관순 외에는 그 가족의 이름 누구도 알지 못했는데 이곳에 오니 그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유계출, 유우석, 유인석, 유관석등 수많은 그녀의 직계 핏줄들을 만나게 된다.

 

작년에 유관순열사의 이름이 누락된 교과서가 있다고 해서 이슈가 된적이 있다. 미래엔, 천재교육, 금성, 두산동아등인데 유관순 열사 순국 95주기가 된 2015년 역사적으로 균형있는 시각을 갖추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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