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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 선조때 최초의 붕당정치를 이끌다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3. 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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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후반기를 말할때 붕당정치를 빼놀을수가 없다. 선조때 처음 시작된 붕당정치의 시작은 광해군, 인조, 숙종, 경종, 영조, 정조때까지 역사적인 순간에 그들의 정치행보는 조선을 뒤흔들어왔다. 서해 류성룡이 있었던 선조시대에 붕당은 1575년 (선조8년)에 이조전랑직 임명 문제로 인한 갈등을 빚으면서 서쪽에 살던 심의겸과 동쪽에 살던 김효원이 다투면서 시작된다. 서쪽에 살던 사람들을 서인, 동쪽에 살던 사람들을 동인이라 불렀다. 이조 전랑의 직위는 높지는 않았지만 말그대로 요직에 올라기 위한 길목에 있는 직책으로 말그대로 향후 큰 목소리를 내기 위한 발판이 되었다.

 

향후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지는 동인에는 류성룡, 이산해, 김효원이 포진해 있었고 이들은 이황, 조식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균형적인 정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반면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지게 되는 서인은 서울 근방에서 태어난 사람들로 주로 고관대작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나 조선의 역사에서 왕비는 대부분 고관대작에서 채택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들의 세력은 상당히 공고한 편이라고 볼수 있다. 동인에 비해 학문적인 성향이 적었지만 율곡 이이와 성혼 이익이 합류하면서 이론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정철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동인을 몰아세우다.

 

징비록에서도 그려진 사건 기축옥사 정여립 역모사건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동인들을 몰아세우기 위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서인이었다가 동인으로 들어간 정여립은 서인의 중심이었던 이이와 이익을 비판을 비판하기도 했다. 낙향하여 살다가 왜구가 자꾸 출몰하여 백성들을 공격하자 대동계를 조직하여 이를 물리치기까지 했지만 선조의 밀명(?)을 받은 송강 정철에 의해 역모사건의 주인공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때 동인세력중 류성룡과 이산해를 제외하고 상당수가 연결되어 죽거나 귀양가게 된다.

 

서인의 세력도 줄이자..조선 통신사 논란

 

조선을 지킬힘은 부족했을지는 모르지만 정치는 9단이었던 선조는 다시 비대해진 서인들의 세력을 줄일 필요성이 있었다. 왜국에 통신사를 보내는 것을 서인세력들은 극심한 반대를 했지만 선조는 동인 류성룡의 요청대로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류성룡은 정치균형을 위해 정사에는 서인의 황윤길을 부사에는 동인 김성일을 임명하여 보냈다. 이때 류성룡은 동인사람으로 김성일을 선택한 것이 패착이었던 것이라고 볼 수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보고 온자리에서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으나 평소에 왜국을 얕잡아 보기도 하고 정치적인 입지를 고려해 황윤길과 반대되는 보고를 한다. 동인이었던 허성은 서인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 한다. 선조는 과반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부사 김성일의 손을 들어준다. 기축옥사를 통해 피바람을 일으켰던 선조는 다시금 이런 피바람이 불어오는 것에 대해 현실을 외면하면서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북인의 몰락

 

임진왜란 이후에 강경파였던 북인은 정권을 잡고 광해군을 밀었다. 이때 서인들의 세력은 대북정권을 잡기 위한 시도로 서인계 인물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였던 이괄등이 반정을 이끌어서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면서 북인은 몰락하게 된다. 이후 공신이었던 이괄은 한성부판윤에 머물다가 다시 평안북도 병마 절도사로 임명되어 갔는데 자신이 무고를 당하자 병력을 이끌고 다시금 한성으로 공격을 한다. 그러나 여러번의 관군과 격투끝에 죽음을 당하면서 이괄의 난은 끝을 맺게 된다. 

 

북인과 남인으로 이루어졌던 동인중 북인세력은 몰락하고 남인들만 일부 남아 소규모 세력을 유지한다.  

 

 

숙종의 장희빈 남인을 위한 발판이 되다.

 

15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은 15년동안 후사를 보지 못했다. 장옥정은 숙종 9년에 궁에 들어와 후궁이 된 인물로 장옥정과 인현왕후 민씨는 정치싸움의 표면적인 인물들이었다. 인현왕후 민씨의 배후는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이고 희빈장씨편은 야당인 남인들이었다. 왕자로 흥한 희빈장씨와 남인은 왕자로 인해 모든것을 잃어버렸다. 그 왕자는 훗날 영조가 될 연잉군으로 숙빈 최씨의 도움을 받아 서인들이 득세하면서 갑술환국을 일으켰고 사형/유배/삭탈관직된 남인들만 130여명에 달했다. 이후에 야당인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여당이였던 서인들역시 두파로 갈리게 된다.

 

이제 정치적인 균형은 완전히 깨지고 기득권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왕을 두고 다투기 시작한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비극..소론

 

경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짦은 치세를 남긴채 세상을 떠나고 온건파였던 소론은 정치판에서 밀려나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노론 세력이었던 사도세자의 주변에는 그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궁지에 몰린 사도세자는 이상행동(?)을 보이며 아버지 영조의 눈밖에 나게 된다. 때 맞춰 태어난 정조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는 사도세자는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정적일 뿐이었다.

 

영조 탕평책을 외치다.

 

노론기반의 임금이었으면서 정치적인 균형을 생각했던 영조시대에는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이삼장군은 소론의 중심에 있었는데 그다지 당색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고 2등공신 함은군에 피봉되고 건립비를 하사받았다.

 

외암 이간은 적지 않은 학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오래 있지 않았다. 일생의 대부분을 이곳 외암마을에서 머물렀는데  ‘인간과 사물의 본성은 같은 것(人物性同論)’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으로 인해 숙종, 경종, 영조,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비극과 정치싸움은 많이 부각되었으나 호락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외암 이간은 그다지 집중받지 못했다.

 

정조 사람을 품다.

 

나는 정치적인 균형을 이루었던 조선의 임금으로 정조를 마지막으로 꼽는다.

정조시대에는 적지 않은 인물이 나왔다. 정약용 형제를 비롯하여 어사 박문수는 대표적인 서민 친화적인 인물이다.

소론의 시작은 논산의 윤증에서 비롯되었지만 박문수가 살았을때는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에게 배운다. 1723년 경동 3년에 증광문과에 합격하며 벼슬길을 시작한 박문수는 백성의 고충을 들어주는 그런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다.

소론이지만 당론이 문제가 있으면 비판할줄 알았으며 고른 인재의 등용을 주장하였다. 조선시대의 평등한 교육기관이였던 향교를 후퇴시킨 서원의 문제점을 지적해 안동서원을 철폐시켰지만 그로 인해 탄핵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된다.

 

충청도 지역에서도 적지 않은 활동을 했던 정약용은 농촌사회의 모순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모색하였다. 정조의 사후에 유배등의 생활의 거치며 현실성있는 학문을 완성하려는 시도를 했다.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재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려한 '경세유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한 '목민심서',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 위한 덕치의 규범을 명확히 하고자한 '흠흠신서'등 주옥같은 저술을 남겼다. 

 

이후 정치적인 균형따위는 조선에서 찾아볼수가 없었다. 안동김씨, 풍양조씨같은 세도가만이 남아 있었는데 약 100년간 지속되던 조선 말기는 힘없이 일본에게 침략을 당하고 36년의 긴지배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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