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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서혈사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4.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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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라함은 지금 사찰은 없지만 사찰이 있었던 곳을 말한다.

공주의 웅진동을  깊숙히 들어가보면 서혈사지란 곳이 있다. 큰절의 흔적도 아니고 작은 사찰의 흔적으로 보이는데 이곳의 창건 설화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무언가 전설이 있을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다. 모든 국가가 점점 경제가 안정되고 사람들의 소득도 어느정도 수준에 이르다보면 대부분 자연스럽게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돌리게 되고 정부나 지자체에서는 고대와 근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자료를 수집해 알리는데 앞장을 선다.

 

 

 

차를 끌고 얼마나 들어온지 모른다. 대체 서혈사지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중간에 푯말은 하나정도만 있고 거의 감으로 찾아서 올라가야 한다. 그나마 네비게이션이 잘 되어 있으면 겨우 찾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찾기가 힘들다. 서혈사지 근처가지 오면 민가가 나오는데 아마도 중간은 사유지인 모양이다. 경운기로 올라가는길이 막혀 있어서 내려서 300~400m정도는 다시 걸어올라가야 한다.

 

 

드디어 아무것도 없는 서혈사지에 당도했다.

서혈사지는 백제시대에 세워진 후 통일신라시대 이후까지 있었던 서혈사터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한다. 3차례 발굴을 거쳐 남쪽으로부터 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세워졌으며 일탑식 사찰구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석탑의 일부분과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기와들이 발견되었으며 서혈사라고 적힌 기와도 출되었다고 한다.

 

 

서혈사가 왜 없어졌는지 알려져있지는 않다. 쉬엇골 마을 서쪽에 망월산 동쪽 경사면 중턱에 자리한 서혈사는 <<동국여지승람>>에 의해 망월산에 있다고 기록된 바 있어서 존재가 확인되었다. 1929년 사지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석불 3구가 발견되었다. 1969년의 1차 조사에서는 동서 길이 9.05m, 남북 길이 5.85m 규모의 건물지 1동

1970년도에는 탑지 및 동서 길이 10m의 남북 길이 8m규모의 금당지의 지대석와 초석 2매 및 적심석지 5지점이 조사되었다.

 

 

 

서혈사지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것은 서혈사지 석조여래좌상인데 공주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다. 서혈사지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으로 부드러운 인상과 옷주름이 심플한 것이 특징이다. 앉은 자세는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하였으며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아래로  편 항마촉지인이다.

 

서혈사지에서 기와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백제를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면 중기에 해당하는 공주시대에 세워진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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