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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유허지를 보며 생각한 계유정난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4. 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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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가 묻힌 곳은 세종시이지만 그가 살던 곳은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 있다.

절재 김종서(1383 ~ 1453)의 생가지이면서 그의 가족이 평생을 살았던 이곳은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다. 절재 김종서 선생의 순천 김씨 가문이 멸문을 당하면서 현재까지 비어있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즉 "김종서 생가지"로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월곡리에서 태어나 태종 5년 (1405)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섭렵하다 세종 16년 (1434)에는 함길도절제사가 되어 잘 알려진 육진을 개척하는 큰 공을 세웠다. 문종 때 우의정이 되고 단종때는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며 수양대군을 견제하다 계유정난때 죽임을 당한다.

 

 

가문이 멸문을 당하면서 이곳 생가도 같이 없어져버렸다. 세조는 조선 초 통치 체제 정비라는 치적을 남겼지만 후세의 평가는 권력을 좇은 비정한 왕이라는 평가 뒤에는 항상 김종서 장군이 가려져 있다. 계유정난으로 시작된 세조의 쿠데타를 왕권과 신(臣)권의 대립으로 보는 관점으로 보면 김종서나 황보인들의 신권은 제거되어야만 했던 것인지 평가에 따라 다르다.

 

 

 

 

황보인·김종서 등 일부 대신은 섭정에 가까운 권력을 휘둘렀지만 왕권과 신권, 어느 한쪽이 비대해지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유교적 여론정치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했던 세조조차도 아이러니컬하게도 왕권에 가장 큰 위협이 된 훈구세력을 양산했다는 사실이다. 세조 집권을 도왔던 측근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관직을 독점하며 거대한 정치집단으로 성장했다.

 

 

그가 살던곳의 흔적은 모두 없어졌지만 이렇게 빈자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세월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잘못된 쿠데타의 유산으로 만들어진 공신들의 권한은 세조 후반에 더욱더 비대해지고 강해져서 각종 비리와 부정을 저질렀을 뿐만이 아니라 관직매매까지 허용받게 된다.

 

역사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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