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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홍대용, 세상을 바꾸는 꿈을 꾸었던 사람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4. 2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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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상가이며 조선시대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로 알려졌던 홍대용은 정약용에 비해서는 덜 알려져있지만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다양한 저서를 남긴 인물이다. 당시에는 다소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의견을 내세웠던 홍대용은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역임하고 1780년 영주군수(榮州郡守)가 되었다.

 

천문학이 낯설었던 시절 지구의 자전을 설파했고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한 경제정책과 8세 이상의 모든 아동들을 취학시켜야 한다는 교육제도를 주장했다.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등 간쟁기관(諫爭機關)을 폐지하고 모든 사람에게 발언권을 주어야 할 것과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장정이 노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 봉건적 신분제도의 타파를 부르짖었던 사람이다.

 

 

 

천안에 가면 이렇게 천안홍대용과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담헌 홍대용 선생의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 뿐만이 아니라 플라네타리움, 달빛마당, 상설전시관 (홍대용 주제관, 과학사전시관, 과학체험관)을 만날 수 있고 월요일을 제외하고 주관측실과, 보조관측실에서 다양한 천체들을 직접 관측해볼 수 있다.

 

 

달빛마당에는 이런 양부일구 (오목해시계)도 만날 수 있다.

 

 

이건 일반적인 평면해시계로 태양의 방향에 따라 시간을 측정해볼 수 있다.

 

 

과학관의 건물은 1~4층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1층에는 15m 돔스크린에 펼쳐지는 입체영상과 가상의 별자리를 체험해볼 수 있고 2~3층은 홍대용에 대한 기획전시실과 마지막으로 4층 관측실에서는 800mm반사망원경, 120mm 굴절망원경으로 태양, 달, 행성, 성운, 성당을 관측해볼 수 있다.

 

 

홍대용 과학관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져있는곳에 이렇게 담헌 홍대용 선생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홍대용은 유학자 김원행에게 배웠으며 북학파의 실학자 박지원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역시 과거에 수차례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다.  시험이 모든 능력이 검증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인간 역시 다른 생물들과 다르지 않으며 지구는 자전하고 우주 무한론을 주장했던 홍대용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특히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조선조정과 달리 어떠한 나라도 중심이 될 수 없고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하였다. 대체 어떤 기준으로 중심이 되고 오랑케가 되는 것인가? 특히 그의 사상중에 마음에 드는 것은 당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부분이다.

 

 

이곳 생가지는 지도에서도 잘 나오지 않는다.

물론 네비게이션으로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냥 주변을 뒤지고 다니다보니 만날 수 있었던 홍대용 선생 생가지로 지금은 그 터만이 남아 있다.

 

 

주차장도 마련되지 않았고 그냥 주춧돌만이 그가 살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홍대용의 저서로는  ≪담헌설총≫(湛軒說叢)이 있으며 편저로 ≪건정필담≫(乾淨筆談), ≪의산문답≫(毉山問答), ≪유포문답≫(劉鮑問答), ≪주해수용≫(籌解需用), ≪담헌연기≫(湛軒燕記), ≪임하경륜≫(林下經綸), ≪사서문의≫(四書問疑), ≪삼경문답≫(三經問答), ≪심성문≫(心性問), ≪계방일기≫(桂坊日記), ≪항전척독≫(抗傳尺牘) 등이 있다.

 

조선 후기의 가장 뛰어났던 과학사상가이며 삶의 철학까지 제시하였던 인물 홍대용이 생각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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