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가던 도중에 만난 팻말에 이들의 흔적을 찾아 안쪽으로 들어가보았다.
애국지사의 이름은 생소한 김교선 선생과 박영학 선생이다. 평범했던 농민이었던 김교선 선생과 박영학선생은 4월 1일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가 박영학선생은 매맞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고 김교선 선생은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3.1운동은 기억해도 4.1운동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같은해 똑같이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지만 먼저 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 열사에 자연스럽게 가려진 느낌이다. 병천 시장의 장날을 기해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는데 이때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홍일선, 박영학등이 약 3,000명의 장꾼이 모여 대대적인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일본 헌병들이 이들을 제지하였고 맞서 싸우던 주민에게 발표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김교선과 박영학은 일경에 체포되어 김교선은 5월 21일 공주 지방법원에서 2년형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교선은 옥고를 치룬후 출소해 살다가 1970년에 사망하였다. 박영학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천안 헌병대에서 태형 60대를 선고받고 빈사 상태로 석방되었다가 휴유증으로 이듬해인 1920년에 사망하였다.
박영학은 1991년에 김교선은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 흔적을 찾아가는 길에 있는 느티나무 보호수로 수령은 무려 400년에 가깝다. 수고는 22m이며 나무둘레는 6.3m에 달한다. 이 나무만이 그날의 흔적을 기억하고 있는듯 하다.
그러고보니 충남에서는 나라가 위급한 일이 있을때 항상 나선 인물들이 많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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