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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맞아 충남의 독립운동가 찾기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8. 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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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광복이 70주년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대규모의 사면 및 14일을 휴일을 정하면서 국민 관심을 광복절으로 집중시키고 있다. 전국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지만 유독 충남에는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이 태어난 곳이 많은 편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그들의 행보와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 3.1운동의 주역 유관순 열사 ]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現 병천면 용두리)에서 유중권씨의 삼남이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어. 선교사 부인인 Ms. Alise H.Sharp의 배려로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 보통과 3학년으로 편입학하였는데 이때 다양한 사상과 세계사 동향을 접하게 된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서거로 민족이 울분에 도가니에 휩싸이게 된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가 두려워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리자 유관순은 천안으로 내려와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동안 서울에서 있었던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하며 독립운동을 의논한다. 


이때 유관순과 그 부모는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거사일은 아우내 장터의 장이 서는 음력 3월 1일(양력 4월 1일)로 잡았는데 유관순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에 참가하도록 설득하고, 밤새도록 태극기를 만든다. 거사일이 되자 이미 연락한대로 알고 찾아온 군중과 장사꾼으로 아우내 장터는 독립운동의 기운이 모이기 시작하고 유관순은 행렬의 선봉이 되어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부르짖는다. 


이때 유관순 부모님은 현장에서 살해당하고 유관순은 체포된다. 추국당시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핀잔을 주자 관순은 일어나 걸상을 들어 검사를 쳤는데 이로 인해 법정 모독죄를 추가하여 당시 함께 재판을 밭았던 누구보다도 중형인 7년형으로 되었지만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1920년 9월 말 영양실조로 순국하게 된다. 


유관순 열사 생가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




 

[ 대마도에서 순국한 면암 최익현 ] 


최익현은 이항로에게서 유학을 배웠으며 조선말 위정척사론과 개화론이 맞서는 때에 위정척사론의 대표격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강직한 성품덕에 고생을 많이 하게 되는데 충청도 관찰사 유장환을 비판하였다가 사직하기도 하고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려고 하자 재정이 부족한 조선의 민생을 파탄시키는 일이라고 시폐사조소라는 상소를 올려 파직당하게 된다. 

 

<시폐사조소 時弊四條疏>

1. 경복궁 중건 등 토목 역사를 중지하고

2. 세금을 걷는 정치를 그만두며

3. 당백전을 혁파하고

4. 사대문세를 금지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본 후 최익현은 최후의 수단인 의병을 일으킬 것을 선택하는데 이 때 올린 것이 바로 청토오적소와 창의토적소야. 의병항일전을 택하긴 했으나 불과 일주일만에 조선의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와 대치하다가 동포끼리 죽일 수 없다하여 결전을 포기한다. 이후 사로잡혀서 대마도에 끌려간 후 그곳에서 순국한다. 


신의 나이 74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년 화하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최익현 선생묘 :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4-1


[ 중국도 못한 일을 했던 윤봉길 의사 ]  


고향에서 사람들을 교육하고 계몽하던 윤봉길 의사는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1932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중 상하이 파견군 시리카와[白川義則] 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켰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마쓰[重光葵],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의 거사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11월 18일 일본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로,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2001년 12월 22일에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의거에 사용된 물통형 폭탄, 자결용 도시락폭탄등 28종 56점의 유물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윤봉길 의사 어록탑에는 이런 말이 남겨져 있다.


1. 뜻을 세우다 - 일본 글은 가짜다

2. 다같이 나가다 - 희망의 나라로 가자

3. 바로보고 바로배우자 - 미래를 현재의 토대 위에서 준비하자

4. 생명창고를 지키자 - 생명창고는 농민의 몫이다

5. 자유를 챙취하자 - 사람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6. 큰 사랑을 깨닫자 - 큰 사랑에 눈을 뜨자

7. 이상을 실천하자 - 사람은 왜 사느냐


윤봉길 의사 생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2-10



[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 ] 


독립운동가인 백야 김좌진은 홍성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개화사상이 있던 김좌진 장군은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재산을 청산한 적이 있다. 1905년 호명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920년 10월 21일에서 27일까지 김좌진이 이끈 대한 독립군이 청산리에서 일본군 3,300명을 섬멸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꾸준한 독립운동을 주도했는데 항일독립이라는 공동목표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은 차별 없이 힘을 합쳤었지만 1926년 5월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이 결성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1929년에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김좌진은 영안현 지역의 농민들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만주총국의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한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서리가 고국생각을 돌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김좌진 장군 생가 :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28-2


[ 저항하는 시인 만해 한용운 ]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한용운은 20대 후반의 나이인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를 하는데 이때는 일본과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을 체결하던 해이다. 교과서에서 많이 본 '님의 침묵'은 1926년에 발표한 것으로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해 한용운이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은 1919년 3.1 독림운동을 이끌면서 부터인데 33인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작성하였다.


불교에 귀의했지만 조선시대 말에 무능해진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던 만해 한용운은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그가 저항문학에 선두에 선 것은 바로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민족의 현실과 이상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민족문화의 경지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한 방법이기도 했다.말년에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지기도 했던 한용운은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훈련이 있던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만해 한용운 생가 :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


[ 촌철살인 한마디로 말하다 월남 이상재 ] 


이상재 선생(1850 ~ 1927)은 지금 충청남도 서천(당시 한산)에서 태어났다. 이상재 선생의 호는 월남으로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사회운동을 하고 일제에 맞섰던 인물이다.이상재선생은 1896 7월 서재필박사와 함께 독립협회 창립을 주동하여 중앙위원과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1908년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곧 운명을 달리했다. 이상재 선생 역시 관직에 꿈을 품고 서울에 올라와서 시험을 치루었으나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이 심했던 당시 조선 조정에서 낙방을 하게 되고 다시는 관직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이상재 선생은 박정양의 식객으로 10여년을 지내면서 두루두루 세상을 배우게 된다.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 단장으로 떠날때 그를 수행하는 수행원으로 일본을 가게 된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였던 김옥균등과 이때 교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개화를 해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1905년 고종의 요청으로 의정부 참찬을 맡았을때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다. 나라의 국운이 쇠함을 한탄하며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을 준비하다가 일제의 통감부에 구속되었고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자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민중 시위를 전개하였다.


1927년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외었으나 그해 사망하였다.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간 이상재 선생은 환영회에서 한마디씩 하게 되는데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다가 "내가 오늘 병기창을 구경하였더니 대포와 총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과연 일본은 강국의 면모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퍽 유감이었소. 성경에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했으니 나는 일본이 그리 될까 걱정이오.


월남 이상재 생가 :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단길 71


[ 구한말 의사 수당 이남규 ] 


수당 이남규 (1855-1907) 선생은 선비 가문에서 태어나 조선시대 말기에 민족적 위기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분이다. 일본에 의해 본인과 아들, 가마꾼과 함께 일제의 칼날에 순국하였기 때문에 묘소에 같이 모여 있다. 아계 이산해의 손자 이구의 부인이 1637년 이곳에 건립하였고 1846년에 다시 지은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 갑오경장과 을미사변때 수당 이남규 선생이 글을 올려 그에 대한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906년 병오의병 때 홍주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주어 1907년에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온양 편촌 냇가에서 피살되었다. 남규 선생 가문은 4대가 서울현충원에 나란히 안장된 유일한 가문이다. 1대 이남규 선생과 2대 이충구 선생,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3대 이승복 선생, 6·25전쟁에 참전한 4대 이장원 해병 소위가 있다. 


수당 이남규 생가 :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181-8

상세정보


주소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181-8상세정보


[ 순흥안씨 네명이 일어서다 ] 


안창식선생은 두 아들 병찬, 병림과 함께 1895년 을미의병에 투신했다. 부자가 나라의 넘어가는 것을 분개하며 일어난 것이다. 895년 12월 1일 홍주성에 입성할 게획을 세우고 민병등을 모아 홍주의병을 거의하도록 도왔다. 안병찬 선생은 1895년 을미의병을 주도한 여파로 3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고종에 의해 석방되었다. 이후 1906년 민종식의 병오홍주의병의 참모로 활약하여 옥고를 치룬 후 1919년 파리만국강화회의에 장서서명사건으로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룬다. 


안창식 선생의 아들이었던 안병림 선생은 민종식의 병오홍주의병 당시 참모사 및 돌격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안항식 선생은 1906년 4월 25일 병오홍주의병 당시 참모로 활약하여 일제에게 체포된 후 대마도로 후송 감금되었다가 4년만에 귀국하였다. 


청양의 청대사 :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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