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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애라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11. 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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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월 서울에서 이춘식의 셋째 딸로 태어난 이애라의 이름은 충남 아산 영인면에 가면 충국순의비에 새겨져 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을까?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이화학당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에 독립운동가인 아산 출신의 이규갑 선생을 만나 20세애 결혼을 한 이애라는 남편을 따라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이규갑 선생이 직장이 평양으로 옮기자 같이 전근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전에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그를 따라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3·1 독립만세운동 당시 애국부인회를 지도하다 일경에 체포돼 옥중생활을 하게 된다. 다시 풀려나게 되지만 독립운동의 핵심이 열악한 재정문제에 있다는 것을 알고 1920년 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모금운동을 주도한다.

 

모금운동을 주도하던 이애라는 어린 딸을 업고 친정 형님 집으로 가던 도중에 일본 헌병을 만나 업은 아기를 빼앗긴다. 백일이 갓 지난 아이는 일본 헌병에게 빼앗겨 바로 땅에 내동댕이쳐져서 즉사한다. 아이의 죽음을 보았지만 이애라는 헌병에게 잡혀가서 고문을 당한다. 다시 석방이 되지만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에 모든 연락을 담당하며 조직을 이끌어나간다.

 

 

출옥한 이애라는 이듬해에 수원, 공주, 아산등의 지방교회를 전전하며 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모금운동을 주도한다. 이후 이애라는 천안 양대 여학교 교사로 취직하기도 하고 공주로 내려가서 머물기도 했으나 몇일을 못가 형사들이 남편인 이규갑을 찾아내라고 닥달하고 연행하기도 했다.

 

이규갑 선생의 행방을 추궁당하고 고문을 받던 이애라는 결국 아산으로 피신했지만 아산에서도 일본 형사의 손길을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이때 이애라 선생은 27살의 나이에 시숙인 이규풍이 거주하는 러시아로 망명하기로 결심을 한다. 1921년 경원선 열차로 원산으로 갔다가 함경북도 웅기항에 도착하였으나 총독부 경무국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순사들에게 잡히게 된다.

 

오랫동안의 투옥생활과 고문으로 몸이 망가질때로 망가진 이애라는 구사일생으로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였으나 고문 휴유증으로 사경을 헤매게 된다. 이규갑 선생과 겨우 만나게 되나 몇일 후 27살의 나이에 이국땅에서 순국한다.

 

충남 아산에 있는 충국순의비에는 아래처럼 적혀져 있다.

 

품성이 현숙 효순하여 범사에 관후하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양육사업에 종사하다가 서기 1919년 3․1독립만세 때에 애국부인회를 지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평양, 공주에서 옥중생활을 하였다... 그 후에 부군 리규갑 씨가 독립운동을 하는 시베리아로 밀행하다가 함경북도 승가항에서 왜적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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