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체험단 및 삶이야기/역사다시 읽기

한음 이덕형의 흔적 당진에서 서울까지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12.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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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읽었던 책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역사책을 꼽으라면 오성과 한음을 빼놓을 수 없다. 서울에 일이 있어 갈일이 많은데 서울역을 갔다가 SK브로드밴드 본사가기전에 이덕형 선생집터라는 비석을 발견하고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한성부판윤과 영의정을 지낸 한음 이덕형(1561~1613) 선생 집터가 그곳에 있었다.

 

관심을 가지고 조금더 찾다보니 한음선생 영정은 문화재자료 298호로 지정되어 충남 당진시 송악읍 금곡리 산50에 위치해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한 인물의 영정이 문화재자료로 지정될정도라니 책으로만 접했던 한음선생의 그림자가 얼마나 크다는 것인가. 한음을 이야기할때 오성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덕형과 이항복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신으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며 선조와 광해군을 모두 겪은 명재상이였다.

 

특히 이덕형은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중간에서 당쟁을 조정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덕형은 영의정이였던 이산해의 사위였다. 이산해에게 소개한 사람은 바로 보령을 가다보면 국도변에서 만날 수 있는 토정비결로도 유명한 이지함이다. 이덕형과 이항복은 장난이 많기로도 유명했는데 귀신과 떡이야기, 달걀이야기, 스승을 놀린이야기등이 구전으로 전해온다. 이덕형과 이항복이 서당에서 스승에게 배울때 스승이 졸자 불이 났다고 외쳤는데 이때 스승은 잔것이 아니라 공자님을 만나고 온것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이후에 이항복과 이덕형이 졸자 스승이 꾸짖으려 하자 공자를 만나고 왔다고 역으로 대응한 이들에게 스승은 공자가 무슨 말을 했냐고 되묻자 공자님은 스승님을 만난 적이 없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덕형은 19세의 나이에 별시 문과로 급제한 후 승승장구하며 주요 요직을 겸했다. 임진왜란전까지 화려한 경력을 쌓던 이항복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에 가서 원군을 요청하고 임진왜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게 된다. 특히나 이순신이 하옥되자 유성룡과 같이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했다는 것을 보면 전세를 읽을줄 아는 인물이였던것으로 보인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 즉위당시 이덕형은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만들었다. 남인이였던 이덕형은 당색에서 자유로웠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오르면서 최고의 영예를 누린다. 몇년후 이덕형은 인목대비를 폐출하려는 시도에 반대하고 결국은 탄핵을 당해 지금의 양평군으로 낙향했다.

 

서울역 전면으로 올라가다보면 이렇게 이덕형선생의 집터를 볼 수 있다.

탄핵을 당하고 낙향했던 이덕형은 삭탈관직을 당하고 불과 한달뒤에 세상을 떠난다.

장난기많았던 어린시절을 지내고 역사책에서 보듯이 많은 일을 이루었던 이덕형의 말로가 당쟁속에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의 재능을 펼치며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는데 일조했던 인물 이덕형의 초상화는 당진 송악면 금곡리 산50 '한음영장'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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