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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정조를 통해 꿈꾼 창조경제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11.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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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군주로 알려진 정조는 그 누구보다도 어찰을 많이 남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왕의 자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도 공유해줄 수 없는 고뇌를 가지고 살아간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개혁적이며 학자풍의 군주를 꼽으라면 두 명 외에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조선전기의 세종과 후기의 정조다. 그러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순탄한 군주의 삶을 살았던 세종보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던 정조의 인생이 다이내믹해 보인다.

 

소통이 이 시대의 화두가 된지 오래지만 정말로 소통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통의 군주 정조가 선택한 수단 중에 하나는 바로 어찰이다. 정조의 죽음 뒤에 독살설이 따라다녔지만 그의 가장 큰 정적 이였던 심환지 에게 적지 않은 비밀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가 선택한 소통의 방법이 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소통하고 고민하는 정조가 있었다면 그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한 신하들이 그의 시대에 같이 공감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정약용으로 정조 7년 세자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증광감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면서 정조를 첫 대면하게 된다. 자신의 꿈을 조금씩 그려가던 정조 앞에 나타난 정약용과의 만남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1762년은 사도세자가 죽은 해로 임오년인데 같은 해에 정약용이 태어난 것이다. 정조는 정약용을 보며 아버지 사도세자를 연상했을 것이다. 그를 아끼고 관심을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화 역린에서 그려졌듯이 정조가 사랑한 대표적인 책은 중용이었다. 영화 속에서 신하들에게 서얼과 노비면천에 대한 방안을 가져오라는 물음에 신하들이 반발하자 ‘그대들의 답은 빈하다’로 대응하였다. 정약용이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 정조가 내준 과제는 바로 ‘중용’에 관한 것으로 자신이 의문으로 여긴 70여 항목을 뽑고는 여기에 답하라는 것이었다.

 

 

정조는 소통하면서도 인재를 어떻게 키워야하는지 알고 있었던 인물이다. 매번 수석을 놓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쉽게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 이 같은 고난은 후에 정약용이 쓴 수많은 저서중 주옥같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만약 정조가 그처럼 단련시키지 않았더라면 정약용이 그런 주옥같은 책을 저술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조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다.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영남은 낙인 찍혀 소외되었는데 재야학자 이진동이 ‘무신창의록’을 올린다. 신하들은 그 것을 읽지 말라고 했으나 정조는 꼼꼼히 읽은 후 이진동의 상소가 일리 있다는 판단했고 이는 야당 소수파였던 남인의 기반을 마련해준다.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다양한 인재의 활용으로 현실화되었다. 특히 서양과학에 대해 남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정약용은 정조 시대에 빛을 발휘하게 된다. 화성행차때 필요한 주교를 설계하는 일을 정약용에게 맡겼다. 정약용은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고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서 실용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남인의 인재가 필요했지만 정조는 무작정 중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명한 군주 정조는 노론에 비해 힘이 없었던 남인을 중용해보았자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노론의 인물을 중용하는 것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남인에게 들이댄 것이다. 그래야 그들의 리그에서 살아남는 강인함을 가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정조의 인재 교육관을 보면 지금 교육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낼 수 있다. 그는 200년도 훨씬 이전에 미국 명문대가 가르치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 정조의 수련법은 선행학습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깨닫는 방식으로 한국의 현재 교육이 꼭 배워야하는 학습법이다.

 

 

 

 

정조의 위대한 발자취중 하나인 오늘날의 수원성, 즉 화성은 사도세자의 도읍이기도 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사랑했고 효를 다했다. 사랑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여막살이를 하던 정약용에게 화성을 쌓는 규제를 만들어 바치라고 명을 한다. 정조의 아버지 사랑은 백성 사랑으로 나타났는데 모든 백성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나라의 시작은 화성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조가 명하고 정약용이 설계한 화성은 이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세종시를 만들어 정부를 이전한 것 이상으로 화성은 18세기 건축문화의 정수이며 서양의 과학기술이 집대성된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이다. 왕궁 속에 있었지만 정조는 조선사회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소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독일이 하나가 되고 일본 역시 세계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보다 정조는 수십 년 먼저 변화를 주도하였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대부들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당시 조선사회는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상업이 활발해지고 있었으며 백성은 조선이 변하길 원했다. 백성과 같이 생각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본 정조는 화성을 짓게 된다.

 

 

화성은 조선변화의 중심에 있는 건축물이었다. 국가적으로 거대한 사업이었던 세종 시는 행정기능을 하는 행정 도시로 기획되었지만 조선시대의 화성은 행정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상업도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정조는 생각했다. 정조가 화성 내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하고 삼남과 용인으로 통하는 십자로를 개통한 것은 행정기능만으로 도시가 활성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앞서서 계획한 것이다.

 

 

저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는 아산, 서산, 당진의 농경지는 방조제를 건설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인구가 폭발적적으로 증가할 때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먹을거리다. 화성이 조선 변화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 대규모 농경지는 필수적이다. 화성 주위의 쓸모없던 땅을 개간하여 대규모 농장을 만들고 꼭 필요한 농업용수는 진목천을 막아 둑을 쌓고 갑문을 설치하여 확보하였다.

 

 

정조의 행적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수백 년이지나 건설된 삽교천 방조제는 삽교호를 만들어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자주 범람하여 수해가 막심했던 아산, 당진지역의 문제를 해결했다. 정조가 건설을 주문한 만석거는 진목천 주변의 수해를 해결하고 대규모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살기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는 방식은 강제 노역이 아닌 임금 노동을 통해서 한 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이었다.

 

 

세계 대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실행했던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은 미국을 수렁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이 당시 대규모 공공사업이 진행되었는데 대형 토목공사를 통해 일자리를 잃었던 미국인들이 먹고 살 수 있었다. 정조가 밀어붙인 화성건설에 이어 만석거와 대유둔은 흉년으로 인해 먹고 살기 힘들었던 백성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주었고 이로 인해 주변지역도 활성화되면서 경기가 살아났다. 루스벨트가 추진했던 뉴딜정책의 본질적인 부분을 1794년에 정조는 알고 실행에 옮겼다.

 

이제 조선의 백성들에게도 희망이 생겼고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지만 그 과실이 조선의 구석구석까지 전달되기 위해서는 왕을 대신할 누군가 필요했다. 흔히 암행어사 박문수를 들어본 적이 있어도 암행어사 정약용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정조는 만석거와 대유둔을 건설하던 해에 정약용을 암행어사로 제수하였다.

 

조선은 정조라는 탁월한 군주를 만났지만 온기가 조선 팔도에까지 퍼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16세 이상만 납부하는 군포를 갓난애에게도 부과하는 황구첨정, 죽은 자를 군적에 올려 징수하는 백골징포등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부정과 부패가 조선 곳곳에 만연하였다. 암행어사 정약용은 농촌이 빈곤하게 사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 양반 사대부들이 군포를 납부하지 않음으로서 발생하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한 정약용은 이를 그려 정조에게 바쳤다. 그러나 어버이의 마음으로 백성을 아꼈던 정조도 군포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당시 기득 권이였던 노론과의 힘겨루기 등을 통한 균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조독살설은 역사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하더라도 어찌 보면 1인 독재를 했던 정조만 없어지면 모두 무산이 된다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약용 같은 실용적인 지식과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던 지식인과 백성들은 역사 발전과 근대로의 발돋움을 원했다. 그 중심에 소통하는 군주 정조가 있었지만 그가 죽음으로써 그가 생각한 조선의 미래는 오지 않았다. 정조시대의 모든 개혁조치는 노론 벽파에 의해 과거로 되돌아갔다.

 

정조는 어버이 사도세자에게 효를 다하면서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정치세력도 소통으로 품었다. 정치적 기반이 약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화성을 건설했고 주변의 농경지를 개척하였다. 정조가 가진 실학정신은 정약용을 통해 현실화되었고 백성과의 소통을 위해 끊임없이 화성행차를 감행하였다.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소흘함이 없었고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시대의 문제점을 밝혀내는데 거침이 없었다. 정조가 생각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인재가 그의 손발이 되어주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이 꿈꾼 세상은 정조가 꿈꾼 세상과 같았다.

 

정조가 소통을 위해 쓴 편지를 보면 감동도 있고 유머도 있으며 속어, 속담이 담겨져 있다. 만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던 근엄한 군주가 아니라 따뜻하면서도 친근한 말 한마디를 아끼지 않았던 평범하면서 비범했던 인물 정조

 

 

정조의 삶에는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해서 만든 화성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알기에 정적에게 쓴 편지

정약용의 실학정신을 활용할 줄 알았던 인물

정조가 꿈꾸었던 세상은 나의 가슴속에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11월 27일 ~ 30일 창조경제 박람회가 열립니다.

http://creativekorea2014.or.kr 에서 관련 정보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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