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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과 그를 모신 문헌서원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11.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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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을 말할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목은 이색이다. 주자 성리학의 대가였던 이색은 1353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하면서 관리의 길에 들어선다. 인생초기에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던 이색은 고려가 사회의 변화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현실개혁을 해야 하지만 자신이 하는일이 정당하면서 옳다고 생각하였고 정몽주와 노선을 같이 했지만 정도전과는 다른길을 걸었다.

 

목은 이색은 고려말 원나라의 간섭을 받고 있을때 원제국의 과거시험을 본 이력이 있다. 원나라의 도읍인 대도에 유학하면서 결국 과거시험에서 수석을 한 것이다. 그의 이력은 아버지인 이곡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곡은 원나라 제과에 응시하여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의 관리로 임명되어 일하였다. 이후 자신의 관청에서 일하던 호중연에게 이색을 가르치게 하였다. 가르침을 받은 이색은 불과 14세의 나이에 성균시에 합격하였으며 원라라 수도 대도에서 유학을 하게된다. 그의 경력은 1354년 제과에 합격하면서 한림원의 관리로 임명되어 일하다가 귀국하여 고려의 관리로 일하였다.

 

고려에서 일하던 이색은 1365년 신돈이 참여한 개혁정치로 인해 교육.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로 일을 했으나 신돈이 실각하자 그의 정치이력은 잠시 침체기를 맞았지만 이성계가 정계 중심으로 등장한 위화도 회군때 문화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정도전과의 정치적인 대결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급격한 전제개혁에 반대했던 이색은 결국 정도전등의 상소로 인해 장단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정도전과의 정치싸움에서 진 이색은 고려 말기의 정치권력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색은 주자 성리학을 수용했으며 그 영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주자학을 이해했던 이색은 불교에 의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문헌서원은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한때 폐쇄되기도 하였으나 1969년에 일부를 다시 세우고 201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문헌서원은 충남 서천군 기산면 서원로 172번길에 위치해 있다.

 

 

문헌서원은 한산이씨를 본관지로 하는 서원으로 제향인물은 이곡, 이색, 이종덕, 이종학, 이종선, 이맹균, 이개, 이자 선현8위를 제향하고 있다. 이곳은 무려 500년가까이 전에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한 창건연대는 모르고 있다.

 

오늘날 특수목적고에 해당하는 서원은 초기 설립목적과 달리 기득권의 기반을 마련하는 교육기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현재 만들어져 있는 문헌서원에는 효정사, 진수당, 교육관, 목은선생신도비, 장판각, 목은선생영당이 조성되어 있다. 목은 이색은 고려말의 충신이였지만 기득권의 입장을 대변하였던 사람이다. 문헌서원의 특이한 건물은 수각으로 한산소곡주의 물이 나오는 발원샘으로 그 술의 깊은 맛의 기본이 되는 물을 마셔볼 수 있다.

 

고려말 최고의 학자로 칭송되었지만 고려말의 변화와 중국과의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했던 목은 이색이지만 적어도 당시 최고의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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