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나 문과에 급제하면 교지를 받는다. 보통 조선에서 관료에게 관직을 내리는 문서를 교지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임명장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 사회보다 조선은 사람쓰는 일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고신'이라 함은 어진 이를 높이고자 했던 임금을 담은 문서이기도 하다.
아래는 이순신이 1576년 3월 보인 이순신이 무과 병과에 제사인으로 급제한 홍패이다. 이순신이 받1은 교지 역시 왕권을 상징하는 문서이기도 하지만 백성을 편안히 다스리고 그 덕을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어진 이를 관직에 두고, 공이 있으면 그 공을 치하하고자 한 예를 담은 무서였다.
벌써 오랜세월이 지났지만 이순신에게 내린 교지가 남아 있다.
충무공 이순신은 1545년 서울의 건천동에서 태어나 외가에 있는 아산으로 내려와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후 아산의 유력가문 상주 방씨와 혼인한다음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저 교지를 받고 아산을 떠나 관직 생활을 하다가 1598년 순국한 후 아산에 묻혔다.
본 사부유서는 1594년 7월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될 때 받은 명령서로 군사지휘권을 부여한다는 문서이다. 사부유서를 보면 당시 군사 동원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둔전검칙유지는 선조가 1595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군량 확보와 백성 구휼 등을 당부하는 문서이기도 하다.
이순신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냈던 아산은 바다가 내륙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곳이다. 아산에서는 인물이 많이 나온것으로 유명한데 이순신에게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기도 하다. 1597년 4월 백의종군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와 아산 본가에서 묵었는데 이때 어머니가 이순신을 보기위해 여수에서 오다가 세상을 떠나지만 백의종군중이였던 이순신은 어머니의 장례로 치루지 못한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명량이라는 영화에서도 나왔지만 어머니를 모신 방향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머니를 유달리 그리워했던 이순신은 어머니를 '오직 하나 뿐인 하늘'이라고 불렀다. 단 12척의 배로 330척을 상대하여 국가의 위기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그에게 믿을 대상은 바로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명량대첩을 통해 엄청난 수의 일본 군선을 물리친다.
'제품체험단 및 삶이야기 > 역사다시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을 가진 문인 김시습 충남 홍산에 잠들다 (0) | 2014.11.03 |
---|---|
일제에 맞선 충남 서천 인물 이상재 (0) | 2014.10.27 |
명량, 이충무공의 영정과 어제 신도비 (0) | 2014.08.14 |
명량으로 보는 한중일 도검전쟁 (0) | 2014.08.12 |
명량 승리의 비밀을 간직한 조선군선 (0) | 2014.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