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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에서 선조까지 보령의 학자 이산해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12. 1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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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바로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 선생때문이다. 이지함선생의 조카였다는 이산해의 행적에 관심이 가게 된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보령 해안가를 갈때면 항상 보는 보이는 '이지함 선생묘'라는 표지를 보면서 지나갔는데 토정 이지함도 그렇고 이산해의 아버지인 이지번도 모두 한산 이씨 출신이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때 이지번의 아들로 태어난 이산해는 고려말의 유학자 이색의 후예다. 이색이 비록 정도전과의 정치싸움에서 져서 물러났지만 정도전역시 이색에게 배운 유학자이다. 얼마전 글을 쓴 한음 이덕형은 이산해의 사위이다. 이산해의 묘는 예산에 있지만 이산해의 영정은 한산이씨 종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알려졌다.

 

이산해는 어릴때부터 충청도 보령을 자주 왕래하다 수년을 보령에서 보내게 된 것은 바로 명종 즉위년에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의 화옥으로 을사사화때문이였다. 아버지 이지번은 아들을 데리고 보령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산해가 처음 조정에 발을 내딛게 된것은 1561년 문과에 급제하고 다음해에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면서 부터이다.

 

 

향후 10년간 주요 요직을 겸하면서 승승장구 한다.  잠시 벼슬길에서 내려올때도 있었지만 자신만의 길을 꾸준히 걸으며 당대의 권신 윤원형을 탄핵하는것을 비롯하여 서인 윤두수, 윤근수, 윤현등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명종을 거쳐 선조대에 이르기까지 왕들의 신임은 이산해를 떠나지 않았던것 같다. 정려립의 역모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1589년의 기축옥사때 연루되었다고 하여 궁지에 몰렸으나 왕의 신임은 그대로 이산해에게 남아 있었다.

 

 

 

보령에서 서해안을 타고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토정 이지함의 묘로 가는 길을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웠다는 류성룡, 이덕형과 달리 영의정이였던 이산해는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이산해는 유배되고 수년을 유배지에서 보낸 후에 고향인 보령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임진왜란 이후에 쓸만한 조정대신이 없었던 탓일까? 이산해는 선조의 요청으로 곧바로 영돈녕부사로 복직되고 대제학을 겸한뒤 4년만에 다시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보령을 사랑했던 이산해는 검소한 삶을 살았던것으로 알려져 있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하고 불과 1년 6개월 후에 이산해 역시 생을 마감했다. 숙부였던 이지함과 같이 검소한 삶을 살았던 인물 이산해는 자신이 바닷가에 살았던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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