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까지 명나라에 대한 해바라기 사랑(?)을 그치지 않았던 인조를 왕으로 만들 주역중에 충남인물 이귀가 있었다. 이귀가 태어난 연안이씨 가문은 명문가로 적지 않은 관리를 배출했지만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관리는 많지 않았던 가문이다. 임진왜란때 의병도 일으키는 등 적지 않은 공을 세우면서 한성을 탈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귀가 광해군에게 불만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이이첨의 일파를 처형한 이유로 옥에 갇혀 있었던 최기와 만나 공초를 수정했다가 탄핵을 받고 유배되면서부터이다.
다시 벼슬길에 올라서기는 했지만 광해군에게 이미 마음이 떠나버린 이귀는 김자점등과 함께 능양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 1등에 연평부원군으로 봉해진 후 탄탄대로의 벼슬길을 걷게 된다. 충청도 인물이였던 이덕형과도 교분을 쌓았던 이귀는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안에서 근무할 당시 조선시대의 명기 이매창과의 남다른 인연(?)을 이어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매창은 부안지방에 유명한 기생으로 시조와 한시에 능하였고 춤과 거문고 솜씨도 매우 뛰어났던 사람이였다. 조선시대 여류시인 매창은 시인 유희경에게 처음 가마를 올렸지만 이귀와도 연인관계이기도 했다. 매창은 당시 작가였던 허균하고도 적지 않은 교류를 했었다.
동인의 몰락을 일으키게 만든 정여립 사건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에 일어난다. 정여립을 맹비난하며 비판한 사람이 바로 이귀였다. 임진왜란 당시 세자 광해군을 도와 민십을 수습하기도 하고 적지 않은 활약을 하면서 선조말에 요직을 역임하면서 승승장구 한다. 선조때 확실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이귀는 정인홍을 공격하였지만 광해군이 즉위한 후 실세가 된 정인홍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 적지 않은 정인홍의 공격에 결국 파직되고 역모사건등에 연루되면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면서 광해군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된다.
북인이 기반이 된 광해군에게 반기를 들고 권력을 잡고 싶었던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으나 아직 실천하기에 조직력이 부족했다. 이때 이들이 끌어들인 인물이 이귀였다. 의병도 조직하고 임진왜란때 활약한 경험이 있었던 이귀가 합류함으로써 반정을 하기 위한 그들의 꿈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귀는 평산부사로 임명되면서 군사력을 가지게 된다. 김개시등에 의해 눈과귀가 막혀있던 광해군은 이귀의 수상한 움직임을 무시하고 자신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훈련대장 이흥립조차 반정의 편에 섰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귀는 현실적인 인물이였던 것 같다. 당시 명나라는 저물어가는 해고 떠오르는 해는 청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광해군을 몰아냈지만 인조가 현실적인 감각을 가지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인조대에 임금이 도망쳤던 남한산성의 수축도 이귀의 공이었다.
이귀가 한 행동중에 가장 타당성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인조의 아버지였던 정원군의 추숭을 추진한 것이었다. 당시 전쟁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기 이를데가 없었는데 계속해서 정원군을 왕으로 추승을 이귀가 주장하였다. 선조에서 원종으로 이어지고 다시 인조로 이어지는 그런 스토리를 만든다면 왕권 강화에 득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것은 인조와 몇몇의 권력가에게만 좋은 일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모두가 척화를 주장하였지만 최명길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던 이귀는 불가능한 정의를 실현하기보다 실현가능한 불의가 현실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귀의 정치인생을 보면 적지 않은 굴곡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인생의 마지막에는 자신의 가문을 명문가로 올리고 세상을 떠난 이귀는 충남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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