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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이름으로 만든 외암마을의 이간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1. 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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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에 가면 아산 건재고택이 중심에 있는 오래된 민속마을이 있다. 그 마을의 이름을 외암마을이라고 부르는데 외암은 숙종과 영조를 거쳐 벼슬을 했던 이간의 호이다. 외암에 예안이씨가 장착하게 된 것은 조선 명종때 이정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살면서 부터인데 그 후로 외암(巍巖) 이간(1677~1727)이 출세를 하면서 설화산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지은 그의 호 ‘외암(巍巖)’에서 따서 마을이름을 정했다. 한자는 ‘외암(外巖)'으로 변경되었다.

 

이간은 숙종시대를 거쳐 경종과 영조시대를 살았다. 숙종초에는 회니시비(懷尼是非)를 계기로 서인의 학자들이 노론과 서론으로 나누어졌다. 회니시비는 송시열과 그의 제자였던 윤증과의 견해차로 일어난 일이었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일로 남인이 실각한 경신환국때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에 대한 처리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1680년에 일어난 경신환국은 후에 희빈에 올랐다가 폐출된 장옥정의 배후에는 남인들이 있었지만 이미 경신환국등으로 인해 그 정치적 기반을 잃어버렸다. 

 

남인처리에 엄했던 송시열과 관대했던 윤증의 정치사상적 견해차는 매우컸다. 주자학의 송시열과 양명학의 윤증은 대립각을 세웠지만 우선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대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윤증이 송시열의 숭명의리론의 허구의 비판의 내용이 담긴 신유의서가 송시열에게 전달됨으로써 둘 사이의 갈등은 극대화되었다. 이때 이간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오상(五常)을 금수(禽獸)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문제등의 설을 제시하였다.

 

 

 

외암 이간은 적지 않은 학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오래 있지 않았다. 일생의 대부분을 이곳 외암마을에서 머물렀는데  ‘인간과 사물의 본성은 같은 것(人物性同論)’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으로 인해 숙종, 경종, 영조,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비극과 정치싸움은 많이 부각되었으나 호락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외암 이간은 그다지 집중받지 못했다.

 

외암 이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예안이씨 집성촌에는 참판댁에서 제주로 올리던 '연엽주'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150년전부터 빚기 시작했다고 하니 외암 이간때 만들어진 술은 아니다. 연엽주의 알코올 도수는 13도 정도. 집에서 전통식으로 담그기 때문에 일정한 도수를 유지하기는 어려우며, 12도에서 15도 사이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건재고택은 행안부지정 ‘정원100선’에 선정된 정원으로 마을 뒷산인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끌어들여 연못의 정원수로 이용했다는 외암 민속마을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길 42-7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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