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체험단 및 삶이야기/역사다시 읽기

시대가 나은 경쟁자 예산 김정희 vs 전주 이삼만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1. 1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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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자가 없으면 발전하기가 쉽지 않다. 나보다 나은 상대를 발견하고 자신을 정진하여 나가는 것은 스트레스라기 보다 기쁨이 될 수 있다. 당시 명필으로 주목받던 사람은 추사 김정희였지만 그 못지 않게 자신만의 서체를 만든 인물로 창암 이삼만이 있었다. 나이로는 추사 김정희보다 16살 위면서 같은 동시대에 글로 먹고 살았던 두 사람의 삶은 다이나믹함 그자체이다. 



추사 김정희의 집안은 예산에서도 이름있는 교목세가 출신으로 20대때 이미 베이징에 가서 옹방강이나 완원같은 대가에게 서법지도를 받았다. 이에 반해 창암 이삼만은 전주 이씨 양반 집안이었지만 당대에 이미 몰락해 땟거리를 걱정해야 할 신세로 평생 글로 먹고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서체가 강직하면서 기세가 느껴진다면 창암 이삼만의 서체는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분다는 유수체가 특징이다. 



김정희의 추사체는 한대의 예서체를 기본으로 개발되었다. 옹방강과 완원을 통해 서예 원류에 대한 연구를 거듭해오다가 마침내 완성하였다. 종횡의 굵고 가는 획들의 대조가 눈에 띄는 것이 그의 서체의 특징이다. 추사는 작품을 만들때 털리 짧은 중국식 붓을 쓴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암 이삼만의 작품을 보면 마치 물흐르듯이 글이 춤추는 느낌이다. 창암 이삼만은 통일신라시대 김생의 글씨를 토대로 조선 고유의 서예미를 구현해냈다. 창압은 터럭이 긴붓을 사용해서 글씨를 썼는데 꾀꼬리 꽁지털등을 사용하여 붓을 만들어 썻다. 


추사는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창암 이삼만을 만나 글씨를 겨루었다고 한다. 글씨를 겨루고 난후 김정희는 창암의 글씨를 이렇게 평가했다. 조필삼십년에 부지자획(30년 붓을 잡았다고 하지만 획도 하나 못 긋는구나!)이라 혹평하였다. 이에 16살 연상의 창암은 김정희가 글씨를 잘 알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은 잘 모르는것 같다라고 말한다. 아마도 탄탄대로를 걸었을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완성되고 잘 갈마무리되었지만 서민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았다고 보았을 것이다. 


제주도 유배가 그의 추사체를 완성해주듯이 그의 인성도 그곳에서 성숙해진 것일까? 

제주도 귀양이 풀려 서울로 가는길에 김정희는 창암을 찾았으나 이미 고인이 되어있었다. 이에 추사 김정희는 그의 묘비에 '명필창암이공삼만지묘'라는 묘비명을 남긴다. 


추사 김정희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개혁파였다면 창암 이삼만은 조선내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든 국내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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