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는 자를 괴롭히는 것만큼 비겁한 일이 없다. 약한자에게 약하고 강한자에게 강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반대로 행동한다. 1883년 충남 에산군 광시면 신흥리에서 태어난 김한종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인물이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잃었다는 슬픔에 같이 격노했다. 최초로 의병활동을 한 계기는 민종식이 충남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같이 동참하면서 항전하였지만 일본군에게 패하게 된다.
이후 광복단장인 박상진과 의기투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대한광복회에 가입한 김한종은 충청도지부장에 임명되어 조직의 책임을 맡게 된다. 어떤 조직이든 가장 중요한 것이 활동자금을 확보하는 일이었는데 김한종은 이런 일들을 주도하였다. 일제의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세금을 탈취하는등의 활동을 한다.
조직의 확대를 위해 김한종은 친분이 있던 주변 사람들을 모집하는데 주로 충청남도 지역인 예산, 아산, 청양, 천안, 홍성을 중심으로 모였고 그중에는 김한종의 문중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자금 모집에 모든 힘을 기울이던 김한종은 생각만큼 군자금 모집이 잘 이루어지지 않자 이를 거부하고 때론 밀고를 하는 친일 부호들을 처단하는데 앞장을 서게 된다.
군자금 모급 통고문등을 일본 헌병에 밀고한 악덕지주인 박용하를 처단하기 위해 장두환에게 지령을 내린다. 김한종에게 지령을 받은 김경태와 임세규는 1918년 박용하의 집에 가서 그를 암살한다. 암살사건이 일본 헌병에 발각이 되면서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 소속의 김한종과 동지 여러명이 일경에게 체포된다. 김함종은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몇일전인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게 된다. 이후 감옥에서 4년동안 옥고를 치루다가 1921년 38세의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사형당한다.
김한종이 이끌었던 조직과 행동강령은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에 맞서 폭력적 투쟁을 전개함으로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백성이 굶주려 가지만 친일 부호들은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민족성을 포기했던것에 비분강개했다. 이후 김한종의 투쟁방식은 의열단이나 한일애국단으로 이어져 독립운동의 한 줄기로 자리잡는다.
우리 4천년 종사는 회진(灰塵)되고 우리 2천만 민족은 노예가 되었다. 섬오랑캐(島夷:일제)의 악정폭행(惡政暴行)은 일가월증(日加月增)하니 이것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끓어올라 조국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念)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소이(所以)이니, 각 동포는 그 지닌 바 능력을 다해 이것을 돕고, 앞으로 본회의 의기(義旗)가 동쪽에 오를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각 자산가는 예축(豫蓄)하여 본회의 요구에 응하여 출금하기 바란다. 만일 본회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그 요구에 불응할 때는 자체 정규(定規)가 있어 이에 따라 징계할 것이다.- 선생이 주도한 대한광복회의 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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