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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의 대표인물 박문수 천안에 잠들다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1. 1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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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는 소론의 인물이었을까? 노론의 인물이였을까?

보통 박문수를 말하면 암행어사만으로만 기억하곤 한다.

사도세자를 지지했으며 정조를 지지했던 당파는 바로 소론으로 노론과 달리 백성의 입장에 가까이 서있었다. 소론의 시작은 논산의 윤증에서 비롯되었지만 박문수가 살았을때는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에게 배운다. 1723년 경동 3년에 증광문과에 합격하며 벼슬길을 시작한 박문수는 백성의 고충을 들어주는 그런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다.

 

정약용 역시 정조때 암행어사를 수행하기도 했는데 암행어사는 국왕의 명으로 지방관의 비리등을 척결하는데 앞장을 섰다. 박문수에게서 암행어사를 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원래 박문수는 정식으로 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한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문수의 소문이 확대되고 전설처럼 자리잡은데에는 어사의 신분으로 영남에 갔을때 환곡을 백성들에게 풀어주면서 부터이다.

 

박문수는 벼슬길에 올라선지 1년만인 영조 1년에 노론이 집권하면서 삭탈관직을 당한다. 이후 1727년 당쟁을 조정하기 위한 영조의 조치로 인해 어사로 영남에 파견이 된 것이다. 이때 이름을 얻게 되지만 암행하는 것이 아닌 그냥 어사의 신분이였다. 이후 다음해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워 관찰사에 올라가게 되고 1730년대에는 도승지에 까지 올라가는등 탄탄대로의 길을 걷는다.

 

 

박문수는 당시 시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았던 인물이였던 것 같다. 소론이지만 당론이 문제가 있으면 비판할줄 알았으며 고른 인재의 등용을 주장하였다. 조선시대의 평등한 교육기관이였던 향교를 후퇴시킨 서원의 문제점을 지적해 안동서원을 철폐시켰지만 그로 인해 탄핵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된다.

 

공평한 처벌과 행동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떤 박문수는 노론의 핵심인물인 조태채를 콩나물 대가리를 잘라버려야 한다는 말로 비꼬기까지  하면서 싫어했지만 조태채의 아들 조관빈이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하자 공평한 처결을 요청하는 말을 영조에게 전한다.

 

농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군포의 폐단은 이후 정조의 인물 정약용도 지적했지만 박문수 역시 그 폐단을 알고 있었고 1739년 함경도 진휼사로 있을때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가지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까지 한다. 이후 병조판서, 어영대장, 호조판서,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한성판윤, 예조판서등 조선의 요직을 겸했다.

 

호조판서로 재직시에 국가 재정에 대한 정비를 주도하면서 균역법 제정에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균역법은 양역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이었다. 암행어사로 계속 일했다면 일부 탐욕스런 지방관을 색출할 수 있었겠지만 다양한 요직에 있으면서 소론의 당론을 따랐던 박문수는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할줄 아는 인물이었기에 더많은 백성의 짐이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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