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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최초의 태수였던 신라의 석학 최치원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5. 1. 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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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 유학했으며 유교.불교.도교를 비롯하여 각종 학문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신라의 석학 최치원은 능력만큼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서 펼쳐보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의 행적중에 서산을 다스리는 태수로 부임하여 자신의 일을 수행한 적이 있다. 경주에서 태어난 최치원은 893년 (진성여왕 7년)에 부성군 (서산시 지곡면 일원) 태수로 부임하여 서산의 최초 태수가 된 것이다.

 

고운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역임할때 보원사(현 보원사지)에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 가야협 雄州 伽倻峽 보원사는 의상(義湘)을 계승한 십사(十寺)중의 하나' 라는 기록문을 남겼다. 현명하며 각종 학문에 깊은 이해를 가졌던 최치원은 어떤 서산을 만들려고 했었을까. 현재 서산에는 서광사가 현존하고 있는데 최치원이 부성군 태수로 부임하여 근무할 때에 서광사에 암자를 짓고 글 공부를 했다는 구전이 전혀져 내려오고 있다.

 

 

 

최치원의 행적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나의 시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주 최씨의 시조로 신라의 석학이라고 불리웠던 인물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으로 어떠한 능력이 있어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는 신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때 '토황소격문'을 쓰고 결국 황소의 난을 격퇴한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헌강왕이 승하하자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가 되어 부임하였다. 최치원이 있을때 신라는 내부에서 무너지기 시작했을때이다. 후삼국시대를 예고하듯이 호족이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국가의 재정은 급속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정국의 혼란이 심해질때 최치원은 대산군.천령군.부성군의 태수를 역임하고 부성군 태수로 부임한 다음해인 894년에는 시무책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아마도 시무 10조가 가시적으로 최치원의 머리속에 자리잡을때는 지금 서산태수로 부임하여 일할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최치원은 유.불.선의 사상을 융합하여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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