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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했지만 600년의 끊임없는 논란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5. 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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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이 복원은 되었지만 인공적으로 복원한 것이라 끊임없는 세금의 낭비가 거론되곤 한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당선되게한 치적이기도 하다. 청계천은 서울의 한 복판을 관통하는 천으로 일명 명당수라고도 한다. 개발논리에 밀려 청계천이 덮이기 전까지의 모습은 영조가 실시한 청계천 준천 공사이다. 7년의 준비 끝에 청계천 준천 공사를 감행했으며 공사는 57일 만에 완공되었다. 


영조가 청계천 공사를 한 것은 영조가 추구했던 민본, 즉 백성을 위하고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실시했던 것이다. 청계천 거의 전 구간에 걸쳐 쌓인 토사를 파낸 대공사가 바로 1760년 경진년이기에 경진준천으로 알려져 있다. 



한양 도심에서 다양한 기능을 하던 청계천이 복개 된것은 바로 1957년이였고 수십년이 흐른 후 2002년 9월에 복개되었다. 청계천의 수계는 조선시대에 백악으로 불리던 북악산 서쪽의 청운동 계곡이다. 한양에서 가장 번화하면서 경제활동의 중심지는 바로 청계천 주변이였다. 



조선시대에는 시전 상인들이 많이살고 있었는데 수공업 작업장들이 조선 말기에 자리잡았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ㅉ고에는 정치를 하는 관리들이 그리고 남쪽에는 관직에 출사하지 않은 글 읽는 선비들이 살고 가까이에는 상업활동을 하는 중인들 중심으로 살았다. 



청계천과 연결된 역사의 스토리텔링중에 숙종과 장희빈의 이야기가 있다. 청계2가의 수표교를 건너가던 숙종이 바람에 날린 발이 떨어진 곳에 있던 장희빈을 못잊어서 결국 궁궐로 불러들였고 그 유명한 희빈장씨 스토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도성의 명당수인 청계천을 보호한다는 중신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던 곳 청계천

한양에 살던 지역민들의 식수 공급, 오폐수 정화의 기능도 했으나 너무나 빠르게 늘어버린 서울시민들의 하수도 기능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개발을 위해 덮어버렸지만 꼭 필요했던 청계천의 복원은 향후 1,000년의 미래를 보고 잘 관리해야 한다. 청계천은 자연적으로 잘 개발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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