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1000)/한국여행(충청)

근대사의 주인공 김좌진 장군의 묘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3. 18. 06:30
728x90
반응형

보령의 여행지중에 하나로 김좌진 장군의 묘소가 있다.

독립운동가인 백야 김좌진은 홍성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개화사상이 있던 김좌진 장군은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재산을 청산한 적이 있다. 1905년 호명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김좌진 장군의 가장 큰 공적은 1920년 10월 21일에서 27일까지 김좌진과 휘하의 이범석, 나중소등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청산리에서 일본군 3,300명을 섬멸한 청산리 대첩이다.

 

 

주차장도 넉넉하고 주변의 풍광도 시원하다. 김좌진 장군의 묘는 이곳에 있지만 김좌진은 홍성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 장군의 집터는 현재 홍성의 갈산 고등학교 부지로 이용되고 있는데 살아있을 때 80칸이 되는 자신의 집을 학교 건물로 내어주고 자신은 초가집으로 나가 살면서 시작되었다.

 

 

김좌진 장군은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 당했다.

이곳은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1로 원래는 오숙근 여사가 1933년에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하였으나 1958년 부인이 타계하자 김두한이 이곳에 합장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조국이 위태로울때 모든 것을 던졌으며 교육이나 언론만으로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독립군을 결성해 무력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장군의 우국충정이 그대로 담긴 시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서리가 고국생각을 돌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봉분의 크기가 마치 조선왕릉을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김좌진 장군은 1930년 1월 24일 북만주 해림의 산시역 부근에서 총을 맞고 쓰려졌다. 당차게 독립군을 이끌었던 그였으냐 그의 마지막은 비극적이였다. 조국의 독립을 보길 원했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일생과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천차만별인데 자신을 희생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우리의 민족정체성을 지켜준 ‘민족 영웅’이다.

 

 

 

 

묘역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세워져 있으며 아래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뒷편에는 담당이 설치되어 있고 사진에서 보다시피 마석상 한쌍이 세워져 있다.

 

 

 

 

 

김좌진이라는 이름은 오늘날에 다시 살아났는데 작년에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1천800t급(214급·SS-Ⅱ) 잠수함인 '김좌진함' 진수식을 거행했다. 김좌진함은 1번 손원일함, 2번 정지함, 3번 안중근함에 이은 4번째 214급 잠수함으로 알려져 있다. 김좌진함은 수중에서 레이더와 소나(음탐기)로 탐지한 300개의 표적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고 대함전, 대공전, 대잠전, 공격기뢰부설 임무 등을 수행한다.

 

김좌진 장군의 충혼이 잠수함이라는 현대식 무기에 힘입어 다시금 대한민국의 땅을 수호하는 것이다. 이곳에 서서 앞을 쳐다보니 풍수지리로 볼때 좋은 묘자리라고 생각될만큼 시원한 느낌이 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