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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비운의 인물 김종서의 흔적이 있는 세종시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4. 3. 1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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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임금은 세조가 아닐까?

최근의 케이블방송에서 왕과 비라는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중심인물이 세조로 그 시대에는 비운의 단종 그리고 세종시대에 화려한 주역들의 죽음때문에 더 다이나믹해져서 그려진다. 조선초기의 재상인 김종서는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출생한 충남 인물이다. 세조 즉위 당시에 역적으로 죽어 시신을 전부 거두지 못하고 한 쪽 다리만을 이 곳 묘소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1433년 함길도도관찰사가 된 뒤 7,8년간 북변에서 머물면서 육진을 개척한 인물이다. 문종때 우의정이 되었다가 1452년 단종 즉위당시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이듬해에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인물이다.

 

육진개척한 인물이라고 해서 무장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으나 문인이며 학자였고 유능한 관료였다. 세조가 왕권을 거머쥐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제거를 해야 했던 인물로 학문과 지략에 대호라고 불릴정도로 무인적인 기상을 가지고 있었던 김종서의 흔적을 찾아가 보았다.  

 

 

 

김종서 장군의 묘소에 가보면 신도비 귀부가 있는데 두꺼비가 듬직하게 비석을 짊어지고 있다.

김종서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결정적인 제도는 바로 의정부사서제이다. 의정부사서제는 6조의 업무를 의정부에서 먼저 받아보고 왕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태종과 세조때를 제외하고 계속 시행되었다.

 

 

김종서 묘역 밑에 가보면 정려각이 있다.

사육신으로 죽음을 맞이한 성삼문의 묘소에 비해 초라한 모습이다. 주차장도 거의 확보가 안되어 있고 관리가 거의 안되는 느낌이 든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편찬했던 김종서는 1746년(영조 22년)에 이르러 충절을 기리게 되면서 관직도 되찾았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결국에는 단종까지 죽음으로 몰아간 인물일지 모른다. 정치적으로 수양대군을 압박하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정계에서 축출하지 못했다. 결국 수양대군에게 역으로 당하고 이어 안평대군, 월산대군, 세종의 후궁까지 줄줄이 죽음을 맞이한다.

 

 

김종서의 묘 앞에는 사진과 똑같은 문관석이 좌, 우 대칭으로 마주보고 세워져 있다.

 

 

묘비중 작은 것이 원래의 것으로 1748년(영조 24년)공주 찬관 이익진과 지방 유생들이 세운것이라고 한다.

 

 

김종서와 그 아들이 죽은 후에 김종서의 아들인 김승규의 아내와 딸은 정인지가 차지했다.  아이러니하게 정인지와 김종서 모두 세종대왕에게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로 정난공신의 주인공이였던 정인지는 영의정까지 올라갔다. 정인지가 아내와 딸을 보살피기 위해 거두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 산45로 바뀌었고 행정구역이 바뀌어서 충청남도 기념물 16호에서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2호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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