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다(1000)/영화평(SF)

설국열차, 달리는 사회(열차)는 멈출수가 없다.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3. 8. 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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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공 혹은 폭력만 난무하는 한국만화와 달리 프랑스만화는 다양한 시각의 만화들이 존재한다. 좀 독특하다고 해야 하나 세계관이 색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주오래전에 프랑스만화를 몇개 접해봤는데 내용에 비해 비싼편이어서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독특하다는것은 인정할만 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봉준호 역시 2004년 홍대 앞 만화가게에서 '설국열차'를 만나게 되면서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후에 9년이나 지난 지금에 그 결심이 이루어지게 된다.

 

빈부의 격차로 인해 서로의 삶의 공간이 달라진다는 설정은 요즘에 특히나 많이 등장한다. 얼마후에 개봉할 맷데이먼의 엘리시움도 그런 컨셉의 영화이다. 이 영화가 조금 독특한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기차에 실려있다는 것이다. 마치 계급사회가 직선으로 이루어진것처럼 앞쪽으로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다음칸을 통과해야 한다. 인타임도 그렇고 모든 칸을 지나갈때는 대가가 필요하다.

 

노아의 기차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웠다는 노아의 방주처럼 이 영화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차를 타야 한다. 가까스로 삶의 한줄기를 거머쥐었지만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거기서 다시 살아남기위해 처절한 투쟁을 해야 한다. 앞쪽에 사는 기득권자들은 꼬리칸에 탄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결국 이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앞쪽을 지키는 군인들과 맞서게 된다.

 

 

17년의 버려진 삶

 

갇힌 공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누군가를 죽이는것뿐이다. 항복이나 투항한 대상을 살릴수 있는 여유공간따위는 없다. 가장 뒤에 공간은 오로지 검은 세상뿐이지만 앞쪽으로 갈수록 식물원, 의상점, 사우나실, 클럽, 일식까지 현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물질세계를 맛보게 된다. 이건 투지의지를 꺽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70년대 80년대 투쟁했던 사람들이 먹고 살만하자 보수화되는것은 결국 배고파야 새로운것을 창조하고 싶은것이다. 화려한 세상에 한번 물들면 세상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는 법이다.

 

 

열차밖의 세상이 있을까

 

과연 앞으로 앞으로 가서 엔진을 차지하면 행복한 세상이 될것인가? 17년동안 열차 밖의 세상은 살만하게 바뀌었을것 같기도 한데 그 속에서 인류가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 그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의 해답을 찾고 있다.

 

두려움만이 있는 세상에서 희망을 찾기 위한 그들의 발걸음은 처절하기만 하다. 모두다 제각기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믿는다

 

 

인간과 계급사회

 

누가 인간사회가 평등하다고 했던가? 과거부터 계급은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계급이 없다고 말하는사람들은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들뿐이다. 꼬리칸에서 살고 있는 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차별의 벽과 계급사회가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암울한 지구 2031년

 

인간의 과학력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는 몰라도 설국열차에서 과학력의 결정체라는 CW-7은 지구를 구하지 못했다. 한국배우들과 헐리우드의 배우들이 같이 연기를 하는 영화는 지금은 낯설지 않다. 연기력으로 본다면 총리 역할의 틸다 스윈튼이 갑이 될듯 하다. 압제적인 행동과 선동하는 힘은 히틀러의 오른팔이였던 괴벨스를 연상케한다.

 

양극에서 선지도자 길리엄과 윌포드는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지만 그 역할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 이 영화는 정치적이면서 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SF영화이지만 다음단계의 레벨을 통과해가는 설국열차만의 매력을 가지고 관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설국열차는 대중적인 영화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어보인다. 의미는 있지만 봉준호식으로 풀어낸 불친절함도 여기저기에 묻어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진만 하는 열차의 속성처럼 속도를 내면서 8월 관객들에게 돌진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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