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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깃발, 국가는 젊은이의 피를 먹고 자란다.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3. 6. 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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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친구의 아버지도 베트남에 파병을 했었고 전투병으로 참전을 했다. 필자의 아버지 역시 베트남전의 전투 담당 하사관으로 참전을 했는데 두분다 공통점이 있다. 전쟁을 겪은 둘은 모두 자신의 성격을 제어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세월을 소일거리를 하면서 보냈다는 점이다. 베트남에 참전했던 모든 한국군들이 정신적인 질환을 앓지 않았겠지만 상당수는 사회에 부적응자였던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오지마의 아버지와 베트남전의 아버지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면 전쟁속에 상당수의 남자들은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었을것이다. 이모지마 전투는 1945년 2월 19일~3월 26일까지 이오지마 섬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과의 전투로 일본은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1944년 3월 ~ 4월 이모지마에 5천명규모의 병력을 주둔하였고 13문의 화포, 경기관총 및 중기관총 도합 200정, 소총은 4,552정의 규모였고 125mm 해안포, 12문의 중대공포, 30문의 25mm 대공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에 추가적으로 일본 병력은 보강되어 22,785명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서 B29를 활용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전략적 요충지 이오지마를 점령해야 했다. 화력이나 병력에서 일본에 훨씬 앞서 있었던 미군은 1주일이면 이오지마를 점령할 수 있을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74일간의 엄청난 폭격을 이모지마에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건재했으며 오히려 미국의 UDT팀에 폭격하여 팀원을 괴멸시킨다. 이오지마 상륙작전이 시작된 2월 19일 당일노스 캐롤라이나호, 워싱턴호, 웨스트 버지니아호가 이모지마에 타격을 시작하면서 시작했고 미군의 제5 수륙양용 군단 소속 3,4,5 해병사단의 3만 병력이 해안에 상륙했다.

 

전력으로만 봐도 월등한 우세에 병력은 일본의 우세를 점했던 해병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화염방사기및 수류탄으로 일본군을 소탕하던 미해병은 셔먼 중천차와 15 전투기 그룹 소속 머스텡 전투기를 통해 압박해나가면서  상륙 5일만에 이오지마에에 세워지는 깃발 사진을 조 로젠탈이 촬영한다. 이는 영웅만들기 작전에 일환으로 철저하게 미국시점에서 바라본것이다. 전쟁을 치루기 위한 돈이 필요했던 미국은 국채를 팔기 위해 5명의 해병과 한명의 해군병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때의 이야기를 중점으로 다룬것이 아버지의 깃발이다.

 

 

 

대부분 죽은 일본군

 

이모지마에서 수비했던 일본군 22,785명중 21,570명이 희생되었고 미국 연합군의 사상자는 26,038명에 이르렀다. 그 유명한 오버로드 상륙작전때 당일 미국 사상자수를 압도하는 결과였다.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된 직접적인 요청은 1964년 5월 9일 미국 존슨 대통령의 요청으로 박정희 정권이 승낙하면서 파병을 결정한다. 이때 당시의 박정희 정권은 경제발전을 한다는 목표로 출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경기침체는 지속되고 있었다. 이때 달러를 벌수 있는 미국의 파병요청은 매우 반가운 일이였다.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흘려 외화를 벌어들일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한국군은 1차와 2차파병때는 전투를 수행하지 않았지만 3차파병때는 전투부대의 파병으로 베트남전에 투입되게 된다. 1965년 3차파병당시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의 파병이 결정되고 실제 전투에 투입이 된다. 이후에 한국군이 잘한다는 미국정부의 설득에 증파를 하게 되는데 이때 아버지는 20살이 안된 나이에 하사관으로 수도사단 제26연대와 제9사단 파병때 참전한다. 9사단은 일명 백마부대라고 불리우던 전투부대이다.

 

 

영웅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나는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다. 왜 그들이 영웅이란 칭호에 그토록 거북해 했는지 말이다. 라는 의무병 아들의 독백처럼 총알을 피한다음 살아남아보려고 했던 그들은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스스로 괴로워했다. 용감하게 싸우다 죽어간 전우들보다 나은것이 무엇인가?

 

1차 2차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세계 최고의 강국으로 자리잡았고 이라크전을 치르면서 중동에서의 막강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한국역시 베트남전으로 상당한 달러를 확보했고 그들의 피로 경제를 살리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전쟁에는 댓가가 필요하지만 그 후에는 상당한 이득이 발생한다. 그 댓가는 젊은이들의 피가 필요할뿐이다.

 

아버지의 깃발처럼 2차세계대전 당시 이오지마에서 영웅을 만든 미국과 베트남에 한국군 깃발을 휘날렸을 한국이 비슷해보이는건 왜일까? 전쟁당시에는 젊은이였지만 지금은 누군가의 아버지였을 전쟁의 희생양들을 호국보훈의 달에 기려본다.

 

 

패권 앞에 승자도 패자도 없다.

 

이들의 영웅은 결국 승자이기에 가능한 인물들이다. 우리는 일본의 신사참배를 욕하지만 일본이 패전했기에 그들의 영웅만들기는 추악해보일뿐인것이다. 전쟁터에서 멀어지는데 성공한 깃발의 영웅들은 전쟁 자금 동원에 끌려다니면서 스스로 무력해지기 시작된다. 전쟁에서 멀어졌지만 전쟁에서 자유로울수 없었던 이들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고 살아남았지만 악몽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를 보는 아들의 눈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내면의 변화가 느껴진다.

 

아버지의 깃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전쟁에 참가했던 수많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기억하기 힘들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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