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1985라는 영화는 고문을 다룬 영화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근태님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신이 당한 끔찍한 고문을 적나라하게 묘사가 되었는데 실제로 국어사전에서는 ‘고문(拷問)’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죄를 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자백을 강요하기 위하여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주며 신문(訊問)함” 혹은, “숨기고 있는 사실을 강제로 알아내기 위하여 육체적 고통을 주며 신문함”
지금보다 훨씬 어두웠던 역사의 순간인 1980년대 중반은 표현의 자유라던가 그런것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다. 영화하나만으로 세상을 바꾸기는 힘들다. 시사프로에서 한번 방영했다고 해서 부조리와 사회의 문제가 한꺼번에 개선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공감하고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스스로 깨달아갈때 세상은 아주 조금씩 바뀌는것이다.
고문은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고문은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그정도의 차이일뿐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정보를 빼는 행동은 언제든지 취할 수 있는 행동중에 하나가 바로 고문이다. 제작노트에서 밝힌 당시의 고문의 방법은 고대나 중세만큼 심하지는 않았겠지만 현대가 시작되고 나서 충분히 악랄했다고 보여진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틀린것도 맞게 만드는 사람들
고문이 이루어지는것은 정보를 얻는데 있어서 과학적이지 못하던가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 위함이다. 아마도 후자쪽이 신군부 정권에서는 더 많이 행해진 행동이였을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에 세워져 1990년대까지 시국사범을 취조하는데 사용된 이 건물은 남산의 안기부, 서빙고동의 보안사와 함께 군부독재 시대의 공포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그러다가 2005년 10월 이후 경찰의 인권보호센터로 개칭한 뒤 인권교육을 위해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지만,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었던 현장으로 그 어두움이 자리하고 있다.
잘못된 신념이 자신도 타인도 망가트린다.
고문기술자 이두한은 왜 그런 고문을 하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까? 당시 참여했던 대다수의 직원들은 인간적인 존엄이라던가 이런것들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결국 자신의 이득을 위해 행한 행동이였기 때문이다. 진급을 위해 혹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혹은 권력이라는 장벽에 들어가기 위함이였을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영화나 근무하는 곳에서의 평생직작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불의도 모른척하고 내부고발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살아간다. 기득권의 힘은 바로 그런곳에서 나온다. 임시직으로 일하다가 계약직으로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정규직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회의 문제따위에는 별다른 관심을 안가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타인을 고문하고 그들의 인권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던 남영동 대공분실 직원은 그 경중의 차이만 있을뿐 그들도 그들대로의 삶을 영위했을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세상이 바뀌는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꾼다.
흔히 빨갱이라고 부르고 초등학교 시절에도 수없이 정신교육을 했던 그시스템은 자본주의와의 대결에서 반세기만에 패배하고말았다. 개념은 좋게 출발했을지는 몰라도 그 이념을 실현하는것이 인간이기에 경쟁력이 떨어지고 결국 지구상에서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국가는 북한이 거의 유일하다. 중국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거의 자본주의 시스템과 다를바가 없는 상태이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더이상 좌파같은것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다. 물론 일부 순수한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대학생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가난해지는 시스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더이상 좌파개념으로 누군가를 몰아세우는 것따위는 의미없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처음도 고문이고 끝도 고문으로 끝이 난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진실따위는 관심도 없고 누군가의 인생을 망쳐도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제 2의 김근태가 나올수도 있고 그들의 힘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죄없는 국민들을 향해 칼날을 들이댈 수 있다. 문득 2차세계대전때의 전범을 찾아서 재판대에 올려놓던 비젠탈이라는 인물이 생각이 난다. 우리는 왜? 조선을 팔아먹었던 친일파를 끝까지 찾아내서 단죄하는 시스템을 가지지 못했는지 남영동 1985를 보면서 그럴수도 있겠구나를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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