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 스물 세번째이야기는 불행이도 지민이가 같이 가지못했던 진주장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장어하면 보통 풍천장어, 진주장어가 많이 유명한데 풍천을 가서 장어는 먹어보지 못했고 이번에 진주를 가서 진주의 유명한 진주장어를 먹었습니다. 진주장어는 비린내가 없고 담백한것이 특징이고 그 주변의 음식점이 남강을 내려다보면서 먹을수 있어 그 맛이 일품입니다.
이름이 지민이의 식객인이상 지민이 사진이 빠질수는 없겠죠? 몇일전 고기집을 가서 지민이가 고기를 먹기전 환호하고 있는 모습이랍니다.
다시 진주장어 이야기로 돌아가면 점심을 먹기위해서 들른곳인데 생각외로 호객행위가 상당합니다. 아주머니들의 잘해준다는 소리와 우리집으로 오라는 소리를 듣다보면 장어를 먹고 싶은 마음이 어느정도는 움추려들정도로 시끄럽습니다.
그래서 저희 일행은 그중에서 호객행위를 하나도 하지 않았던 유정장어라는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유정장어로 들어가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본성동 장어거리 사진을 찍었습니다. 보면 은정장어라고 하는 왼편으로 유정장어집이 보입니다.
유정장어집 내부사진인데 무슨 박제들이 그리 많은지 특히 거북이들의 박제는 온 벽면을 다 채우고 있습니다.
여기의 가격대는 민물장어 1인분이 16,000원 바다장어 1인분이 14,000원입니다. 위사진은 바다장어 사진인데 비릿한 바다내음이 좋아하는 사람 일부 빼고는 좋아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듯 보입니다. 비릿한 냄새때문인지 식으면 안되는 터라 항상 데우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곳의 장어맛은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민물장어는 고소하면서도 쫄깃한 맛이 늦가을이었지만 보양식으로 그만인듯 합니다.
식사를 다하고 100미터쯤 위에 위치한 진주성을 들르지 않을수가 없어서 진주성과 촉석루를 가게 되었습니다.
진주성은 경남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곳으로 임진왜란의 아픔을 그대로 다 겪은곳입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왜국이 조선을 침범했는데 이때 진주성은 두차례에 걸처서 왜병과 싸웠습니다. 1차는 김시민장군이 이끄는 3,800여명의 병력이2만의 왜병을 물리쳤지만 2차때는 조선과 일본의 화의 진행중에 보복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희, 충청병사 황진등을 포함하여 7만명이 순국한 곳입니다.
진주성을 들어가는 입구인 촉석문입니다. 촉석은 강가에 돌이 쫑긋쫑긋 서있다해서 유래된 이름이라 합니다. 평일 낮이라서 그런지 한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입장료는 천원입니다.
드디어 촉석루입니다. 촉석로는 사진으로 보시다시피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되어 있는 고려말의 주장지휘소입니다. 특히 임진왜란때 의기 논개가 낙화 순국한곳으로도 유명하죠..그러나 현재 보고 있는 이 건물은 1973년에 재건된 팔작지붕의 와가입니다.
촉석루의 또다른 이름은 남장대라고도 하는데 꽤 넒고 깨끗해서 앉아서 남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 평정되는것 같은것이 무척이나 좋습니다.
촉석루를 조금 지나서 가보면 지수문이라는곳이 있는데 바로 의기사 논개사당이 있는곳입니다. 임진왜란때 왜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했다는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셨는데 상당히 미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사진이 뒷편의 지수문 입구가 비춰서 논개의 미모가 잘보이지 않는군요.
촉석루 뒷편을 보면 남강변으로 내려가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의 바위들을 의암이라고 부르는데 지형이 요새를 이룰만하다 할수 있습니다. 군사적인 요충지로서의 진주성은 괜찮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것 같습니다.
성벽위에서 바라본 남강변으로 경치가 참 좋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오래된 지형의 결과로 옆으로 세로줄이 층층이 쌓여있는모습이 그대로 잘보입니다. 마치 자그마한 절벽처럼 보입니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진주성곽입니다. 우측에 보면 의기논개지문이라고 하는 의암사적비가 있는데 2차 공격때 민관군이 순절하자 왜장을 끌어않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했다는 논개의 사적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실제 진주성에 가서 한바퀴를 돌아보고 나왔는데 실제로 요새이긴 하였으나 취약점들이 좀 보였습니다. 실제로 남쪽에는 절벽이 있고 남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도 절벽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때는 다른쪽은 참호를 파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아서 남강과 연결했다고 합니다. 이래서 그 형세가 좋았으나 진주를 보면 알겠지만 평지에 위치한 읍성이었기 때문에 옛날에 고구려의 안시성같이 지형적으로 높은 성벽을 유지할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또 지형은 좋고 그 성곽이 요새처럼 보였으나 주변을 돌아보면 이성과 연결된 다른 성들이 없었기 때문에 고립무원에 위치한 성처럼 많은 수의 적군이 합공에서 공격하면 지켜내기가 힘들었을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때는 조총이라는 왜군무기가 있었기에 더 쉽지 않고 만약 좀더 높은 토루같은것을 이용해서 조총공격을 했다고 하면 성이 함락당하는것은 시간문제였을수도 있었을것입니다.
진주성 박물관의 모습입니다. 입장료를 다시 징수하기에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크기가 작지 않은것으로 봐서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적물등이 모두 모여있을것으로 사료됩니다.
진주성의 성곽입니다. 이곳을 따라서 쭈욱 걸어가다보면 다양한 수목도 보이고 천자총통(장거리용), 지자총통(중거리용), 현자총통(단거리용)등이 전시되어있고 진주성 성곽에서 가장 높다는 서장대도 보실 수 있습니다.
쌍충사적비의 모습입니다. 이비도 역시 임진왜란때 싸우다 전사한 제말장군과 정유재란때 전사한 제홍록의 공을 세긴비를 모시고 있습니다.
진주성 박물관의 전면모습입니다.
북장대로 가는길에 있는 비석인데 이날은 문을 잠가놓아서 안에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유방백세라고 세겨진 비석만 찍었습니다. 유방백세(流芳百世)란 원래 중국에서 나온 4자성어같은데 여기에 새겨져 있네요. 流: 흐를 유,류. 芳: 꽃다울 방. 百: 일백 백. 世: 대 세라고 해서 꽃다움을 흘러 보냄이 백대라는 뜻으로, 꽃다운 명예로운 이름이 후세에 오래도록 전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의 정문 역할을 했던 영남포정사로 조선시대의 포졸 모형이 양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진주성탐방의 마지막으로 보았던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동상입니다.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때 진주성 1차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인물로 약 4천여명의 병력으로 2만명을 막아낸 장본인으로 진주성의 지형을 잘 활용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날은 점심을 하기위해서 진주성을 방문했지만 뜻하지 않게 진주성에 가서 이곳저곳을 보면 조선인들의 한이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이때의 조선민중들은 이씨왕조치하에서 신음을 하고 있었기에 초기 일본의 조선침공이 쉬웠던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결국에 조선을 구해낸것은 왕조가 아니라 조선민중과 소수의 선비 그리고 이순신, 김시민 장군같은 걸출한 영웅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본 글을 쓸때 임진왜란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왜란'이라는 것은 왜인들이 일으킨 난리인데 실제 1592년에 침공한 것은 일본 정규군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해인 '임진'이나 왜인들의 난리라는 뜻의 '왜란'보다는 전쟁의 당사자인 조선과 일본의 정식 국명을 써서 '조일전쟁'으로 불리는것이 맞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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