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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의 고택탐방 오영순가옥, 해학이기정선생생가

어린왕자같은 식객 2020. 5. 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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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에도 많은 인물이 있듯이 사람들이 살던 그 공간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저는 오영순가옥과 해학이기정선생의 생가를 둘러보았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자신만의 세상과 견해 그리고 인생관이 전체적으로 바꾸어지는 시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먼저 민속자료 33호로 지정된 오영순가옥으로 먼저 찾아가 보았습니다. 





오영순 가옥은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는 드물게 큰 7칸 규모의 남도형 초가집으로 부엌 남쪽에 밥청이 따로 설치되어 있는 점은 오영순 가옥만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안채는 정면 7칸의 우진각 초가집이다. 사랑채에는 중앙에 대청과 사랑방이 있고 그 좌우에 문간과 광이 달려 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가 평행하게 놓여 있고, 그 동쪽에 별당이 있으며, 안채 남쪽에 잿간과 돼지막 등이 남아 있습니다. 


오영순가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농촌건강장수마을로 궁지호박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초반을 보면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는 있다면서  누구나 다 자기 자신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안중근이나 윤봉길같이 폭압에 저항했던 사람도 있지만 배움으로써 국민을 바꾸려고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김제의 해학 이기정 선생은  황현, 이정직과 더불어 호남 3 걸로 불리는 조선말 실학자이자 항일 독립투사로서 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해학 이기정 선생 생가는 안채 1동과 사랑채 1동의 초가집이었으나 이후 현 거주자가 안채는 스레트로 개조하였고 사랑채는 전파되어 그 터에 창고를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대한자강회와 단학회 등을 통해 교육자로서 민중계몽에 힘썼던 사람입니다. 특히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저서로는 해학유서라는 책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1968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해학 이기정 선생 생가는 소박하면서도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그런 공간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조류처럼 보이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금 역시 세계의 조류가 우리 주변을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 한가운데를 뚫고 흘러가면서 모험과 거친 운명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변화는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것 같지만 스스로의 내면 속에서는 자신도 알지 못한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실학자였다는 이기정 선생 해학의 학문세계는 실학을 바탕으로 하는 당 시대가 필요로 하는 학문을 주장한 것이며, 구국활동에 있어서는 행동적 저항주의, 정치사상에 있어서는 이론에 치우친 급진적 개혁보다는 실천 가능한 점진적 개혁에 핵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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