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1000)/한국여행(충청)

논산의 인물 윤황선생을 모시는 윤황선생재실

어린왕자같은 식객 2020. 4. 24. 07:00
728x90
반응형


조선의 역사 속에서 척화(斥和)와 주화(主和)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임진왜란, 정묘호란, 조선 말기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미 없는 우월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묘호란 때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라는 명분만 지키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긴 하죠.  


1597년(선조 30)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임명되었으며 1608년(광해군 즉위년) 북청판관으로 혼인한 자제를 거느리고 관아에 머물고 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시골에 은거하였던 윤황은 논산에 잠들어 있습니다.  




묘를 쓰고 그 앞에 재실이 지어지는 것의 기본에는 효라는 개념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조선은 유교의 가르침 중에서 효를 사회질서의 기본으로 하는 사회였습니다. 


그 후손들이 찾아가고 제사를 드리는 방식도 효의 다른 모습입니다. 단순히 가족윤리 차원이 아니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원리였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부모의 상이 있다면 혼담이 시작된 상태라도 결혼은 그 3년 후에나 가능하였다고 합니다.   


본관은 파평인 윤황은 자는 덕요이고 호는 팔송인 윤황은 인조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를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의 명을 받았으나 삼사가 주청 하여 화를 면하였다고 합니다. 




윤황 선생의 호가 팔송인 이유는 그가 살던 곳이 남별영이 있던 곳으로 소나무 8그루가 둘러싸여 있고 샘이 있어 팔송정이라고 불렀는데 그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선조, 광해군에 이어 인조까지 조선은 큰 전쟁에 휩싸여 백성들은 더 살기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광해군대에 시골에 은거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길주목사·안변부사·사성·승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5년에 대사간에 이르렀는데 윤황은 백성을 위한 빈곤대책을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진휼 사업은 진휼청을 통해 진행이 되었는데 이는 지방관과 관찰사의 진휼 활동을 지원하고 감시 통제하는 구조였습니다. 


윤황은 사후에 영광의 용계사우(龍溪祠宇),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제향 되었습니다. 윤황은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다는 평을 들었으며 명분을 중요시했던 사람입니다. 





조선 후기 윤순거·윤문거·윤선거·윤증 등 호서 유림의 큰 줄기를 이룬 이들이 모두 이 가계에서 나왔는데 파평윤씨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윤황 선생은 재실이 있고 그 가문의 후손들의 묘소가 이곳에 있습니다. 윤황 선생의 묘의 아래에는 윤황 선생 재실이 있으며 조선 현종 6년(1665)에 안채를 짓고 조선 숙종 21년(1695) 문간채, 서재, 동재를 건축하여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재실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공부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중부 지방 건축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400여 년의 오랜 세월에도 그 형태를 잘 유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묘호란 때와 같이 척화를 주장한 윤황은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었다는 평을 들었는데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풀려난 뒤 생을 마친 후 이곳에 묻힌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중앙관리로서 부모의 병환이 있는 경우 거리에 따라 70일에서 30일까지의 휴가를 주고, 70세 이상의 부모가 있는 사람은 한 아들을, 80세 이상이면 두 아들을 90세 이상이면 모든 아들을 고향에 보내어 부모를 봉양하도록 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나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뼈대가 있는 문중이라면 벌초나 제사등의 준비를 직접 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보통은 묘지기나 산지기가 있어서 묘소·위토·종산·선산·재실 등의 관리를 했던 것입니다. 가문의 재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유력 가문이면서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가문이라는 의미입니다. 명재 윤증의 선대에 윤황을 모신 재실이 바로 이곳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