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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리 서원마을에 흔적을 남긴 백원서원지

어린왕자같은 식객 2020. 3. 2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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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향교나 서원이 있던 곳은 교육기관이 있던 곳이라고 해서 마을이름자체를 그렇게 짓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유래는 서원이나 향교가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렇게 명명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백원서원지가 자리한 곳은 진천의 노원리에는 행정구역은 송림리·신계리·장양리·노원리·사곡리·중산리·동성리·삼룡리·신월리·미잠리·사당리·내촌리 등 12개리가 있는데 그중에 서원마을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처음에는 백원서원지로 찾아서 걸어들어가는 길은 쉽지가 않더군요.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올라가서 보니 진천군의 산중에 한 곳인 무제봉이 있씁니다.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가니 작은 사찰도 자리하고 있네요. 암자같은 모습의 사찰입니다. 노원리는 진천군의 조용한 마을로 한적한 곳이기도 합니다.  


다시 밑으로 걸어서 내려와서 돌아갑니다. 원래 백원서원이 세워졌을 때는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백원서원이 자리했던 터에 도착을 했습니다. 터만 남아 있는 것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원의 터에는 묘소가 있어서 조금은 색다른 풍경이더군요. 


백원서원은 1597년(선조 30)에 이종학(李鍾學)·김덕숭(金德崇)·이여(李畲)·이부(李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이곳에 모셔진 이종학이라는 사람은 고려말의 문신이었던 사람입니다.  대유학자로 그렇게 유명한 이색의 아들로 , 아버지 이색이 정권의 핵심에 있으면서 두 해에 걸쳐 과거를 관장하자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고 합니다. 


양왕이 즉위하고, 이색이 탄핵을 받게 되자, 더불어 벼슬이 떨어지고 쫓겨나게 되는등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뒤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아 함창으로 유배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고 자기의 문생인 김여지(金汝知)가 판관으로 있어서 김여지의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으나, 장사현(長沙縣)으로 옮기는 도중 무촌역(茂村驛)에서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서천에 가면 목은 이색을 모신 서원이 있는데 문헌서원으로 그곳에도 이종학은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이색의 아들이야기를 진천에 와서 만나보니 색다른 느낌입니다.  




서원이 들어서게 되면 그 지역은 유학적으로 인정을 받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대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둘째 아들인 이종학의 생각과 흔적이 남아 있는 백원서원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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