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1000)/한국여행(대전)

선사시대에서 문명의 흔적이 자리한 계족산여행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9. 11. 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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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과정을 거쳐 지금같은 인류의 모습이 지구상에 나타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문명의 시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도 문명의 역사는 찰나에 불과할 정도로 짧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시대에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흔히 뗀석기, 간석기등과 초기 청동기시대등을 선사시대의 삶으로 말하곤 합니다.  


대전의 둔산에 가면 선사인들의 삶이 있는 둔산 선사유적지가 있지만 원래의 유적지들은 둔산을 개발하면서 많이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없는 선사유적지중에 하나가 바로 대덕구 비래동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대전 대덕구 비래동에는 두 개의 고인돌이 남아 있는데 고인돌 1호는 780cm * 440cm 정도의 범위에 잡석 및 황갈색 점토를 약 0.5m ~1m가량 높이로 쌓아 올린 뒤 매장 주체부인 석곽이 축조되어 있고 그 뒤로 2호 고인돌이 남아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잘 관리가 안되어 있다가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관리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땅 위에 기둥 역할을 하는 고인돌을 세운 후 커다란 돌을 올려놓은 것이 탁자식이고 땅 속에 사각형으로 돌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작은 잡석 등을 깔고 커다란 돌을 올려놓은 것이 바둑판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비래동 고인돌은 둘 다 바둑판식입니다.  


고인돌이 있다는 것은 규모가 있는 부족이 살았다는 의미도 된다고 합니다. 청동기 시대에 유력 부족장의 무덤을 만들 때 고인돌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명의 시대 이전의 흔적을 살펴보고 위쪽으로 올라가면 옥류각이 나옵니다.  


올라가다 보면 옛 사람이 써놓은 시구도 볼 수 있습니다.  양기가 발하는 곳이면 금석도 뚫을 수 있으니 정신을 한결같이 하면 어떤 일이던지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남은 섣달 몰아 봄바람 만들려 했더니

다만 추위 속 매화가 선봉이 되었네

듬성등성 남은 꽃 가지고 가벼이 눈과 다투지 말고

맑고 고운 자태 달빛 속에 잘 간직하라



시구를 가슴에 안고 위쪽으로 다시 걸어서 올라가봅니다. 옥류각은 마실 가듯이 조금만 올라가면 나오는 정자입니다.  


계족산으로 등산을 할 수 있는 길은 많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올라와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옥류각은 송준길과 그 문인들이 인조 때(1623∼1649) 송촌동 일대에서 강학(講學)을 하던 자취를 기린 것이다. 정면은 계곡에 임하였으므로 측면으로 드나들도록 되어 있는데 입구 쪽으로부터 2칸은 마루, 나머지 1칸은 방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물이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가도록 해놓은 곳 위에 정자가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부 기둥은 굵은 원기둥이고, 마루 기둥은 가는 사각기둥으로 기둥머리에는 쇠서[牛舌] 모양의 부재를 끼웠으며, 창방으로 도리를 받고 그 위에 서까래를 얹어 지붕을 짠옥류각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니 총 6칸 규모의 자그마한 누각입니다.  




옥류각 옆으로는 비래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작은 사찰이지만 보물 제1829호로 지정된 불상 높이 83㎝, 무릎 폭 59㎝. 1650년(효종 1) 8월에 조각승 무염(無染), 성수(性修) 등이 제작한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바닥에는 묵서(墨書)로 1650년 8월에 화원(畵員) 무염(無染), 양사(養師) 성수(性修), 덕명(德明), 천유(天游), 수화(首畵) 경성(敬聖), 설엄(雪嚴) 등이 제작한 것으로 적혀 있다고 합니다.  




정자안쪽으로 들어와서 잠시 쉬면서 아래에서 만나본 고인돌과 옛 사람들이 써놓은 시, 옥류각이라는 정자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인간들은 모르지만 자연은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자연에게도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고 하는데 그 속에서 사람들도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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