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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 남겨진 유교문화의 산실 원주향교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7. 10. 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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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의 시대에 접어든 21세기는 문화가 산업이 되는 시대에 직면해 있다. 컨텐츠를 표현하는 수단이나 방법은 바뀌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가정과 사회, 어디서나 귀감이 되는 삶을 알려주고 가르쳐주던 한민족 문화의 산실 원주 향교를 찾아가 보았다. 




모든 향교가 그렇듯이 원주향교 역시 조선시대에 국가로부터 토지, 전적, 노비를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다. 갑오개혁 이후 교육적 기능은 사라졌으며 현재는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인 향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정책적으로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확대, 강화되었다. 



향교의 배치는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의 배치에 따라 전면에 배향공간이, 후면에 강학공간이 위치하는 전묘후학(前廟後學)과 전면에 강학공간이 자리 잡고 후면에 배향공간이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띄고 있다. 



원주향교에서 교육공간 이었던 명륜당이다. 



향교에서는 오래된 교육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인생의 심오함을 공부하는 곳으로 심오함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흥미가 있어야 한다. 어린아이들의 경우 모든 것이 흥미롭다. 



향교에서는 사람들이 머물면서 공부를 했다. 유학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학문적으로 꽃을 피운 것은 사실 조선이었다. 진리란 일생생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옛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세상 이치가 도처에 편만하니 공부는 어디서든 해야 한다는 뜻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향교에 모셔져 있던 이황은 일상생활에서의 깨우침을 강조했으며 공부에는 유학과 실학의 경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공부에도 때가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공부는 학생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인간은 모두 공부하는 존재여야 한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묵고 있던 곳으로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까운 데서 생각하고 나의 몸 가까운 데서 출발해 깊은 이치에까지 미친다. 




이곳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殿閣)인 대성전으로 제사를 올릴 때를 제외하고는 문이 닫혀 있는 상태였다.  공자를 중앙에 하고 안자, 증자 등 5성(聖)을 모시고 민손, 염경 등 10철(哲)과 공자의 70제자를 위시한 한ㆍ중 양국의 현인 111위를 배향했다. 우리나라 18현은 설총, 최치원 등이다. 요약하면 공자묘(孔子廟), 문묘(文廟=공자를 모신 사당)의 정전(正殿)이다.


원주향교는 고려 인종 때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목사 신호(申浩)가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3년(선조 36) 이택(李澤)이 대성전을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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