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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람이 있는 대구 전통마을 3곳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8. 6. 2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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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마을을 돌아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해 그런지 몰라도 대구의 외곽에 있는 전통마을 탐방은 즐거운 기억을 남긴다. 대구를 처음 가는 사람들에게 관광해설사가 가장 먼저 추천해주는 전통마을은 옻골마을이다. 경주 최씨는 성의 특징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전국에 집성촌이 많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구에도 경주 최씨 집성촌이 있는데 1616년 대암 최동집 선생이 기운 좋은 곳에 터를 잡아 살면서 후손이 번성하는 곳으로 옻골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해설사 설명에 의하면 옻골마을에 중심이 되는 고택은 백불고택으로 최흥원 선생이 살았던 공간이라고 한다. 환갑에 백불암이라는 호를 썼던 그분은 '백 가지를 알지 못하고 백 가지가 능하지 못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환갑의 나이에도 이룰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는 겸손한 마음을 호에 담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옻골마을에는 백불안 선생이 대암 선생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지었다는 보본당이 있는데. 원형의 기초석 위에 기둥을 세운 이곳에는 교정청을 꾸리고 문인들을 모아 교정을 보아 책자를 엮기도 했다. 





전통마을에는 조상을 모시거나 그 충절을 기리는 사당이 한 곳 쯤은 항상 있는 듯 하다. 






정식명칭은 둔산동 경주 최씨 마을인 옻골마을에는 유독 옻나무가 많다. 돌과 흙을 쌓고 그 위에 암기와·수키와를 얹고 막새로 마무리한 돌담길은 고택까지 굴곡이 있는데 나쁜 기운이 고택으로 흘러들지 않게 만들어진 곳이다. 






보본당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동계정이 나오는데 최주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로 현재 전통 체험장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가장 익숙한 다도 체험이나 예절 교실, 전통 놀이 등의 체험이 이루어지며 특히 아이들의 한복 체험이 인기가 많다고 한다. 



요즘에 전통차가 더 좋아지고 있다. 고택 같은 곳에서 마시는 차 한잔은 마음에 여유와 희망을 담는다. 처음에는 제각기 생김새가 다른 잔에 차를 마시는 이유가 있지만 나중에는 그냥 좋아서 차를 마신다. 차가 있으니까 마시는 것이다. 매번 새로운 삶을 꿈꾼다.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더 나은 아니 더 재미있는 삶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섬유공업이 발달한 도시이며 인구로는 대한민국 제3의 도시인 대구에는 전통색이 살아 있는 공간들이 많다. 



대구의 위쪽에서 내려오다 묘골마을 입구에서 먼저 만나는 건물은 국가 민속문화제 제 104호로 지정된 달성 삼가헌 고택이 나온다. 현 소유자의 6대조 박광석(朴光錫)이 1747년(영조 23)에 건축한 이 고택은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좌향을 잡은 서사택(西四宅)의 하나로, 넓은 터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별당·연못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사육신의 흔적은 전국에 있는데 그분들을 모신 육신사가 대구에 있다는 것은 묘골마을에 와서야 알 수 있었다. 세조(1417~1468)는 박팽년, 성삼문 등을 죽이면서 “박팽년과 성삼문 등은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라고 말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자질을 엿볼 수 있다. 성삼문은 세조의 명에 따라 능지처사를 당했는데 조선시대의 능지처사는 칼로 각 부위를 잘라내지 않고 각각의 부위를 수레에 매어 소를 달리게 하는 ‘거열형’으로 대신했다.




박팽년의 손자는 세조의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해 이곳에 숨어 살았다. 골기와 집이 처마를 맞대고 있는 이곳에는 박일산이 창건한 태고정(보물 제 554호),  문현(文鉉)이 1778년에 세웠다는 도곡재(무형문화재 제32호) ,  중휘(重휘)가 1664년에 세웠다는 금서헌, 성수(聖洙)가 지은 것으로 삼가헌등 오래된 고택도 많지만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은 전국에 4곳만 남아 있다. 사액서원 중의 하나로, 사육신을 제향 했던 ‘낙빈서원’ 역시 이곳에 있다. 마을 입구에는 ‘사육신 기념관’이 있으며, 사육신 사건 당시 이조판서의 신분으로 사육신과 함께 참화를 당한 선생의 아버지 박중림의 사당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육신 중에 직계 혈육을 남긴 인물은 박팽년이 유일하다.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진 선생의 유복손(遺腹孫) ‘박일산’. 바로 그가 태어나고 숨어 살았던 묘골마을은  560년 내력의 박팽년 가문의 세거지로 성장하였다. 




묘골마을에는 유독 이런 공간들이 많다. 휴식을 취하면서 차를 한잔 마시고 사색을 할 수 있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일부 고택들은 지금 보수중인 곳도 있었다. 



인흥마을을 다른 이름으로 말하면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이다. 본리에 있는 남평 문씨 집성촌인 이곳은 인흥사가 있었던 곳이라서 인흥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남평 문씨인 문익점의 18대손 문경호 씨가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마을의 연못이 있는 정원을 지나면 고택 수봉정사가 나온다. 수봉정사 앞에는 국내외 전적과 문건 등 2만여 권이 있는 인수문고가 있다. 인흥마을에는 유독 소나무가 많고 담장으로 이어진 길에는 6월에 주황색의 능소화가 아름답게 핀다. 




풍수지리는 한국인에게 빼놓지 못할 정도로 익숙하다. 지형이 좋긴 하지만 무언가 하나가 부족할 때 그것을 보완하는 것을 비보풍수라고 한다. 묘골마을의 골목은 대부분 직선이고 돌과 흙을 얹어 담을 쌓았다. 






대구에 있는 전통마을에는 모두 풍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풍수지리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토정 이지함이다. 토정 이지함 (李之菡)(1517(인종 1)~78(선조 11))이 토정비결을 만들면서 부터 민간에 서서히 보급이 되기 시작되었다. 지금은 누구나 보는 토정비결이지만 이지함이 중국에서 유행하던 여러 가지 술서(術書)를 인용해 엮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주술처럼 한해의 점을 쳤을지도 모른다. 이지함은 의약·점·천문·지리·음양·술서 등에 모두 능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초가집도 아닌 흙담 움막짐에서 청빈하게 살면서 토정이라는 호까지 붙게 된 인물이다.



묘골마을에는 지금 한참 능소화가 만개하고 있다. 중국의 《시경(詩經)》에 나오는 소지화(笤之華)라고 하였으며 줄기, 뿌리, 잎 모두 약재로 쓰이는 이 꽃은 오늘날에는 귀한 약나무에서 관상용으로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봄이 지나면 화사한 봄꽃보다는 여름의 초록이 더 강해진다. 그런 계절에 능소화는 도시의 시멘트 담, 붉은 벽돌담보다 고즈넉한 옛 시골 돌담에 더 어울린다. 가장자리가 톱날처럼 생긴 여러 개의 잎이 한 잎자루에 달려 있는 겹잎의 능소화는  그냥 주황색이라기보다 노란빛이 많이 들어간 붉은빛을 띤다. 




능소화가 질 때는 꽃잎이 하나하나 떨어져 날아가 버리는 보통의 꽃과는 달리 동백꽃처럼 통째로 떨어진다. 한창 필 때는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피며 한번 피기 시작하면 거의 초가을까지 피고 지고를 이어가는 능소화는 묘골마을의 또 다른 매력을 만들어준다. 




고양이도 새끼일때는 어리광을 피나 보다. 인흥마을에서 만난 고양이가 즐거운지 애교를 부리고 있다. 대구의 전통마을인 남평문씨본리세거지인 인흥마을과 사육신 박팽년 후손이 모여사는 묘골마을, 경주 최씨가 모여사는 옻골마을이 대표적인 곳이다. 세 곳 모두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서 인위적으로 조성된 마을 같은 느낌이 나지 않아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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