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 가장 유명한 문무를 겸비한 사람중에 서희를 빼놓기가 어렵다.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된 서희장군묘는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 있는데 봉분은 부인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싸우지 않고 이긴 서희장군의 흔적을 찾아 여주의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희 장군묘로 가는길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100여미터를 더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서희장군의 묘로 올라가는 길은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다.
서희장군의 가장 큰 공은 바로 거란군과의 협상을 통해 강동 6주까지 탈환한 것이었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서희장군이 쉬고 있다. 거란은 고려 성종 말년인 993년에 소손녕을 앞세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이때 고려 대신들은 항전파와 서경 이뿍 땅을 떼어주고 거란과 싸움을 하지 말자는 화친파로 갈리게 된다.
서희장군은 거란의 내부적인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거란과 송나라의 영토분쟁으로 인해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거란은 송나라를 정벌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거란은 송나라와의 대치상황에서 고려를 눌러 놓을 필요가 있었다. 서희는 이점을 파악해서 거란에게 어필한 것이다. 만약에 거란과 송나라와 전쟁이 일어난다면 송나라를 돕기 위해 참전하지 않겠다는 것은 약속했다.
서희는 그 과정에서 어떻게 강동6주까지 받을 수 있었을까.
강동6주는 홍화진, 융주, 철주, 곽주, 귀주, 통주로 그 면적이 상당하다.
서희는 협상을 하면서 고려조정에는 친송파들이 적지 않으니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하다고 역설을 한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엣 영토였던 강동 6주를 돌려준다면 친송파를 설득하고 고려내에서 거란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설득을 한 것이다.
오래된 묘이니만큼 앞에 있는 석상들은 세월의 풍파에 그 형태가 많이 달라진 듯 하다.
서희장군묘에서 여주의 한 산을 바라보니 정말 뷰가 좋다는 느낌이 든다.
옛 병법에 그런 말이 있다.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고려도 그렇고 조선 역시 문신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강했다. 그래서 문신이 무신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셈이다. 유능한 행정가이며 정치가였던 서희는 고려를 복잡하게 얽혀 있던 관계에서 안전하게 지켜낸 명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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