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옛날에는 배티재라고 불리던 곳이 있다. 배티재는 한자로 이치라고도 부르는데 산과 산을 연결하는 곳은 전략상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경우가 많았다. 금산군에서 완주군으로 넘어가는 이곳 이치에서는 임진년 7월에 큰 전투가 있었다.
지금은 잘 포장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이곳이 무척 험한 곳이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군량미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가를 정도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당시 고바야가와가라는 왜장이 무려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 재를 넘으려고 한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 이순신장군을 가장 많이 거론하지만 육지에서는 권율장군만한 사람은 없었다. 당시 권율장군이 이끌던 군사의 수는 불과 1,500여명으로 2만명의 병력을 대적하기에는 열세였지만 지리적인 이점을 살려서 결국 왜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장 빠른길을 올라가던 왜군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병참선이었다. 그래서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호남을 확보하는것이 절실하였는데 이를 막은 것이 바로 권율로 이치대첩으로 인해 제동이 걸렸다.
2016년 첫 서리가 내린 이치대첩지는 설경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치대첩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읽어볼 수 있다. 이곳은 1866년 금성면(錦城面) 상가리(上佳里)에 이치대첩비와 대첩사 (大捷祠)를 세웠으나 1944년 6월 일제가 항일유적 말살정책으로 폭파되기도 했다.
천천히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며 걸어올라간다. 파괴된 비석은 진산면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다가 1963년 대첩에 참여한 후손과 지역 유지가 지금의 장소에 비석을 건립하였다.
위로 올라오면 1991년부터 성역화 계획의 일환으로 사당과 비각, 내삼문, 외삼문, 담장이 설치되어 있는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이치대첩지는 충청남도와 전라북도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 충청남도는 오랜 시간동안 이곳을 관리해왔지만 전라북도는 이곳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은 상태라고 한다.
대첩비각은 저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치대첩은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인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힐만큼 비각의 의미는 크다.
만약 왜군들을 이곳에서 저지하지 못했다면 곡창지대인 호남에서 확보한 군량미로 조선은 더 큰 위험에 처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기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군사들을 조총공격에 대할 수 있는 진형으로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목책이나 거마등을 이용해 함정을 파놓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상세는 지리산이나 설악산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이름 아침에 보는 산세는 시원하고 맑다. 이곳에 자리한 충장사는 당시 왜적들을 격퇴시키고 만세를 불렀던 선조들의 혼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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