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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의 송시열의 흔적이 이어진 대로사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7. 2. 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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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청은 여주의 남한강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곳에서 백여미터쯤 떨어진 곳에 송시열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로사 혹은 강한사로 불리우는 사우가 있다. 가을에 남한강과 어우러진 대로사를 보며 차 한잔을 마시는 고즈넉함이 꽤나 괜찮은 느낌을 부여하는 곳이다.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로사는 1785년에 건립되었다. 왕명에 의하여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여주의 남한강변에 세워진 이곳은 송시열이 여주에 머물때 마다 있었던 곳이다. 


건물구조는 강당과 사묘, 관리인이 거주하는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출입문인 장인문이 서쪽으로 나 있으며, 사묘 또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서슬퍼런 서원 철폐령에 의해 전국의 송시열과 관련된 서원 및 사우 445개가 모두 헐렸으나 이 대로사만이 이름을 바꾸면서 남아 있다. 



당시 만들어진 건물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서적이나 기타 목판 등이 산실되었다. 정조 때 사액시 대제학인 김종수(金鍾秀)가 쓴 ‘대로사(大老祠)’의 현판이 현재 사묘 안에 보관되어 있다. 



늦가을의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대로사는 노론의 불만을 달래려고 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건축사적으로 대로사는 18세기 익공집의 기준이 될 만큼 부재를 짜올린 수법이 완벽하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권력투쟁의 큰 흐름을 반영하고 있으며 지지세력으로 포섭하고자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을 닦은 노론 중심의 산림(山林)을 중용하기 위해 이곳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곳을 비롯하여 전국에 수많은 흔적을 남긴 우암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대학자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당쟁의 참화를 이끈 편벽한 소인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강학을 논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어지는 인문학 콘서트가 열리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우암이 머물렀던 혹은 우암을 기리기 위해 만든 대로사에도 가을가을한 색채가 물씬 묻어난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 정조가 그의 사당을 지어준 것은 의미가 있다. 




정조9년(1785)대왕이 영녕릉에 참배 오셨다가 김양행 등 유신에게 명하여 건립하게 하고 대로사(大老祠)를 사액하였다. 대로(大老)는 ‘덕망이 높은 노인’ 이라는 뜻이 기려 있다. 우암은 여성들에게도 문자를 가르치고 효와 충과 신의를 강조하였으며, 사자소학에서부터 사서 육경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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