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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옛교육의 산실지 강진향교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6. 12. 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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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지역을 가던지 간에 지역의 중심이었던 곳에는 향교가 꼭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서원의 경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상당수 사라졌으나 백성들이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향교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강진향교는 1398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창건된 곳이다. 전국에 있는 향교가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부터인데 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조선시대의 평등한 교육기관이였던 향교를 후퇴시킨 서원의 문제점을 지적해 안동서원을 철폐시켰지만 그로 인해 탄핵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향교들이 그렇듯이 이곳도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는 상태이다. 


전국에 있는 어느 향교를 가도 이런 태극문양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진향교는 1901년과 1919년에는 대성전을 중수하였으며, 1935년에 명륜당을 중수하였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향교의 가르침은 명륜당에서 시작이 된다. 

유교문화위에 설립된 교육기관인 향교는 조선시대의 교육열을 그대로 받아들인 곳이기도 하다. 유교문화와 교육이 결합된 향교는 지방의 사회질서에 대한 정신을 이어받았는데 향교는 충실히 교육기관으로 역할을 해왔지만 서원이라는 기득권들의 교육기관이 발달하면서 향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향교의 구성은 우리나라 성현 27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인 명륜당, 유생들의 숙소인 통재와 서재, 삼문, 향교의 상징건물, 전사청 등의 건물로 구성이 된다. 


조선시대에는 조부가 손자의 육아일기를 쓰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향교에서 교육을 받고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비법은 반복암기에 있었다고 한다.


향교마다 유명한 인물의 스토리가 엮여져서 내려오기도 하는데 강진향교에는 덕을 기리는 송덕비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의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로 형성하기 위해서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성전은 어느 향교를 가도 꼭 있는 건물로 중국의 5성은 공자, 맹자, 증자, 안자, 자사이며 송조 4현은 정호, 주희, 주돈이, 정이이다. 


강진향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제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유생들이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는 청금록과 사마안도 이곳에 소장이 되어 있다. 개불로 유명한 강진의 향토사의 연구에 또 다른 관점을 부여해준다. 









강진향교를 잘 둘러보았으니 다시 강진을 찾게 되면 강진향교에서 200여미터쯤 떨어진 곳의 남강사를 방문해볼 예정이다. 우암 송시열이 숙종때 제주도로 유배갈 당시 강진에서 머문적이 있는데 만덕산 백련사에서 강론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1803년에 백련사 영당을 건립하였는데 그 건물이 강진읍 평동리로 옮겨졌다. 남강사는 그런 우암 송시열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사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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