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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마음이 필요하다는 포저 조익선생의 흔적

어린왕자같은 식객 2016. 8. 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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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시기는 언제일까. 왕위에 올라가기 위해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 세조가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 연산군의 폭정을 종식시킨 중종반정등 조선의 역사에 굵직굵직한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마 선조-광해군-인조로 이어지는 시기라고 생각이 든다. 이때 반정도 있었지만 서인의 분열, 정치적대립뿐만이 아니라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이시기에 탁월한 정치인으로 류성룡, 이산해 같은 사람도 있지만 산전수전을 다겪은 정치인으로 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1655)도 있었다. 



포저 조익선생의 묘와 도산서원은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에 있다. 현실정치에 적극 가담한 조선시대 대표적 지성인으로 광해군의 정치, 인조반정, 병자호란, 서인의 분열, 대동법등 굵직굵직한 난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 마음은 

온몸의 주인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도망가서 
눈 깜짝할 사이에 몸에서 분리된다네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천리 밖으로 달아나네 
이 몸에 주인 없으면 
집에 사람 없는 것과 같네


포저 조익이 쓴 시의 일부분이다. 몸에 주인이 없으면 집에 사람 없는 것과 같다는 말에서 주인은 마음을 의미한다. 학문의 깊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포저 조익은 주자 설을 비판한 윤휴가 사문난적의 혐의를 받은 것에 비해 합리적인 수정을 가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전 대덕구 송촌동에 동춘당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송준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이기도 하다. 송준길은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서인세력)에 속했던 사람으로 포저의 문하에 들어가 진정으로 그를 좋아하고 칭송하며 따랐다. 포저의 말을 따르고 그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했던 사람도 송준길이다. 


송준길의 묘와 서원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다보면 석탑도 있다. 이 석탑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씌여져 있지는 않다. 


여름이라서 그런지 풀이 무성하게 자라 포저 조익선생 유적지 안내도라는 글을 가리고 있었다. 포저 조익의 묘를 정점으로 건물이 아래로 배치가 되어 있다. 




이곳은 포저선생문집 및 송곡문집판각으로 포저 조익과 그의 아들 송곡 조복양의 문집인 포저.송곡선생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포저 조익은 월사 이정귀, 외숙조 윤근수등에게 배웠으며 백사 이항복에게 이런 찬사를 듣기도 했다. 

“세상에 어찌 이러한 견식과 문장이 있단 말인가.”




이곳의 공사가 마무리될때쯤 방문했었는데 조익선생 묘 주변정비공사로 지붕보수 및 부식목부재교체가 진행되고 있었다. 예산군청이 발주하여 이상건축문화가 시공을 맡았다. 






현재 이곳은 오래되어 삭아가는 구조목들의 교체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포저 조익은 항상 사서를 통해 배우기를 권했으며 지경과 존심을 일생의 근본 공부로 삼고 아래처럼 말하였다. 


"학문을 하는 데는 다만 사욕을 모두 버리고 천리(天理)가 순전한 사람이 되기를 요하며, 다만 광명(光明)하고 쇄락(灑落)하여 천지 귀신(天地鬼神)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요하며, 다만 천하의 일을 담당하여 천지의 화육(化育)을 참찬(參贊)하는 사람이 되기를 요하는데, 그 근본은 마음을 보존하는 데 있다."






포저 조익의 묘는 위쪽에 있는데 포저 조익과 그의 아버지인 조영중 두 분이 모셔져 있다. 이 묘는 조선조 유교의 영향을 받아 아들의 묘가 부모의 묘 위로 못 쓴다는 속설을 깨는 산소이기도 하다. 


160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의 관직을 거친 조익은 인조반정 이후 이좌좌랑을 시작으로 주요 요직들을 겸하였다. 포저기 이곳 예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자 벼슬을 버리고 신창현 도고산에 초가를 짓고 경사의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예산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포저 조익은 1690년(숙종16년)시호를 받으면서 예장 한 것으로 봉분 아래 부분은 둘레돌을 쌓았고 앞으로 한층 아래에는 상석과 묘비가 서 있다. 사우는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집 건물이다. 




임진왜란에 이어 조선은 인조반정으로 왕위 바뀌는 변화를 겪었다.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청나라에 의해 벌어진 병자호란은 조선에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다양한 사상이 들어왔고 어떤이는 배척했지만 포저 조익같은 사람은 그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만의 사상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성리학의 대가로 예학에 밝았던 포저 조익은 이원일 도와 대동법을 확대하고 과거제도의 모순을 지적하여 경전의 이해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임독제도를 제안하기도 했다. 포저는 문방사우의 어느 것도 한 가지 재능만 가지고 있을 뿐, 다른 재능까지 두루 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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